서산과 예산을 굽어보며 서 있는 가야산을 오르는 길은 많은데 오늘은  해미읍에서 4Km 거리에 위치한 일락사(日樂寺)에서 가야산을 오른다. 상왕산 남쪽 기슭에 있는 일락사는 신라 문무왕 3년 의현이 창건하였으며 조선 초까지 일악사라고 하였다. 한때 폐사가 되었다가 조선 초기 중창되었으며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한후 오늘에 이르렀다. 지정된 문화재는 없고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로 만든 좌대와 초석등이 있고 고려 시대의 유물인 대웅전 앞 3층석탑이 있으나 옥개석이 없다.

나는 우수수 떨어지는 은행 이파리 속에 나뒹구는 은행 알을 주워담았다. 다 주웠는가 싶어 굽었던 허리를 펴면 바람 사이로 뚝뚝 은행 알이 떨어지고 그만 주어야지 그만주어야지...우리들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일락사의 해우소를 다녀온 뒤 산행을 준비했다.

뭐니 뭐니해도 일락사는 가야산 기슭의 절터 중 전망이 가장 빼어난 절에 속할 것이다. 일락사에서 목을 축인 뒤 석문봉으로 오르는 임도에 접어들었다. 산길은 아무래도 보일 듯 말 듯 이어지는 오솔길이 좋다. 자갈길을 지나면 콘크리트 길이 나타나는 반복의 길을 숨을 헐떡이며 한 시간 쯤 올라 능선에 도착하여 나뭇잎을 이불삼아 대지에 몸을 누였다. 산의 정기를 온몸에 받아들인 후 조금 더 올라가자 전망 좋은 능선이다. 

"봄 산은 아리따워 웃는 것 같고, 여름 산은 푸르름이 뚝뚝 드는 것 같고, 가을 산은 맑고 깨끗해서 화장한 것 같고, 겨울 산은 참담하여 조는 것 같다"는 옛 글을 떠올려보니, 지금은 무르익은 가을이라 그런지 어디를 보아도 아름다워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고 싶다.

해미읍이 발아래에 깔리고 서산 태안의 평야와 바다가 구름 속에 아련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가야산의 주봉 원효봉(元曉峰)은 거대한 쇠말뚝을 박고서 김제의 모악산처럼 솟아있는 것이다.어찌하여  이 땅의 명산에 정상들은 저마다의 역사와는 무관하게 쇠말뚝들을 박은 채 사람들의 발길을 막고 서 있는가? 우리들은 과학의 이름으로 개발의 이름으로 공룡처럼 버티고 선 쇠말뚝들을 향하여 가슴을 열고 소리질렀다. “송신탑 귀신 물러가라. 물러가라” 그 소리는 산과 강을 넘어 온 나라에 메아리쳤어도 회신은 없고, 산길을 올라가는 발걸음은 팍팍하기만 했다.

석문봉(石門峰, 653m)이다. 동쪽으로는 서원산(書院山, 473m)을 넘어 예당평야가 그림처럼 펼쳐지고 옥양봉(玉洋峰, 621m)이 지척이다. 일락사와 개심사를 품에 안은 일락산(521m) 너머가 당진이고, 해미읍성 지나면 서산 천수만 간척지와 안면도가 아슴푸레하다.

산에 오르면 새삼 사람들이 그리워지고 마음이 열리는데 산을 내려가는 순간 사람들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을 잃어버리는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가는 길은 실상 단조롭다. 가파른 계단이 줄을 잇고 그 계단길이 끝나자 나무  숲길과 계곡이 나타났다. 날이 가문 탓에 흐르는 물길은 찾을 길 없고, 물이 없으니 나무도 바위도 사람 역시 목이 마르다. 억새밭을 지나자 마을과 길들이 환하게 나타났다. 산행의 끝 지점 남연군묘 앞이다.

예산 남연균 묘(신정일 기자)
예산 남연균 묘(신정일 기자)

남연군 묘에 얽힌 사연

가야산 자락 백여 군데의 절 중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던 가야사(伽倻寺)는 그 절들 중에 가장 큰 절이었다. 가야사는 대부분의 절들이 불에 타버린 것과 달리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부러 불태워졌다고 한다. 젊은 시절을 안동 김씨의 세도에 밀려 파락호 혹은 미치광이로 불우한 시절을 보낸 야심가 흥선군이 오랜 세월을 공들여 실행한 일이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이곳에 옮긴 일이다. 황현의 '매천야록' 에 자세히 나와 있는 것처럼 흥선군은 당대의 명지관 정만인에게 명당자리를 부탁 가야산 동쪽에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오는 자리를 얻는다. 우선 그는 임시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 산 기슭으로 옮겼다. 그때 마지막으로 옮겼던 사람들에게 상여가 기증되었고 그 상여가 중요 민속자료 31호로 지정돼 나븐들(남큰들)에 보존돼 있다. 그러나 그 명당터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묘자리는 금탑이 서 있었다.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중들을 쫓아낸 후 불을 지르게 한다. 절은 폐허가 되고 금탑만 남았다. 탑을 헐기로 한 날 밤 네 형제가 똑같이 꿈을 꾸었다. “나는 탑신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의 자리를 빼앗으려 하느냐 만약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면 내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겁에 질린 형들은 모두 그만두기를 원했으나, 대원군은 “그렇다면 이 또한 진실로 명당이다” 라고 말한 뒤 탑을 부수자 도끼날이 튀었다.

그때 대원군이  “나라고 왜 왕의 아비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라고 소리치자 도끼가 튀지 않았고 흥선군은 정만인의 예언대로 대원군이 되었으며 고종 순종 등 2대에 걸쳐 황제를 배출한다. 뒷날 대원군은 이건창에게 장례 치를 때의 일을 얘기해준 적이 있었다.

“탑을 쓰러뜨리니 그 속에 백자 두 개와 단지 두병 그리고 사리 세알이 있었다. 사리는 작은 머리 통 만한 구슬이었는데 매우 밝게 빛났다. 물속에 잠겼지만 푸른 기운이 물속을 꿰뚫고 끊임없이 빛나는 것 같았다” 그런 사연을 지닌 남연군묘를 두고 사람들은 복치형(伏雉形, 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게 아니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조선왕조는 500년 간의 사직에 막을 내리게 된다. 대원군은 고종이 등극한 2년 뒤에 남연군 묘 맞은편 서원산 기슭에 보덕사란 절을 짓고 원당사찰로 삼았다. 남연군 묘는 고종 5년인 1866년(병인년)에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불만을 품은 독일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파헤쳐지는 수난을 겪었으며 그 뒤 다시 천주교도들은 그 일로 인하여 또 한 차례 수난을 겪어야 했다. 

풍수지리상의 길지

바라보면 볼수록 남연군묘의 지세는 한마디로 풍수지리가 일컫는 명당의 조건은 모두 다 갖추었다. 뒤로 가야산 서편 봉우리에 두 바위가 문기둥 처럼 서있는 석문봉이 주산이 되고 오른쪽 옥양봉, 만경봉이 덕산을 거치면서 30리에 걸쳐 용머리에서 멎는 지세가 청룡이 되며 왼쪽으로 백호 지세는 가사봉, 가영봉을 지나 원화봉으로 이어지는 맥이 금청산 원봉에 감싼자리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곳은 풍수지리의 문외한인 사람들일지도 묘 뒤편의 가야산의 능선들이나 묘 앞으로 시원스럽게 펼쳐진 덕산 쪽만 바라보아도 진정한 명당터라고 느낄 수 있다. 나라 안의 제일의 명당터라 알려진 남연군묘를 지나 마지막 답사지 보덕사(報德寺)에 이르렀다.

예산 보덕사. (신정일 기자)
예산 보덕사. (신정일 기자)

보덕사는 남연군묘를 쓴 후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 보은의 뜻으로 이곳에 절을 짓고 보덕사라고 하였으나 6.25때 소실되었던 것을 1951년 2월 에비구니 수옥이 중창했다가 1962년에 다시 중창했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가야사의 옛 절터에서 옮겨져 온 깨어진 석등이 남아 번성했던 가야사의 옛 모습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 절에 보선 스님이 계셨었는데”라는 신순철씨의 말에 고개 끄덕이며 지난봄 가지산 석남사에서 만났던 보선스님을 떠올렸다. 정갈한 음식에 잘 차려진 다과상을 바라보며, 사람이 만드는 음식도 어떻게 누가 어느 곳에서 만들었느냐에 따라 예술일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보선스님이 어디 계시는지 물어볼 사람도 없다.

예산 보덕사. (신정일 기자)
예산 보덕사. (신정일 기자)

오직 주인이 없다는 표시로 나무장대만 가로놓여 가을 햇살을 받고 있으며 잘생긴 노오란 모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채 가을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이젠 돌아가야지 새벽 4시에 시작한 하루의 여정 속에 지는 햇살은 논산 연무대를 돌아올 때 붉게 타올라 피로한 마음을 물들이고 있었다.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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