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자의 “견문(見聞)이 넓은 사람일수록 안목(眼目)이 좁은 사람이 없다.” 라는 말을 좋아 한다. 그리고 그 말보다 더 좋아하는 말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한 구절이다.

“서책(書冊)을 불살라 버려라. 강변의 모래들이 아름답다고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 원컨대 맨발로 그것을 느끼고 싶은 것이다. 어떠한 지식도 우선 감각(感覺)을 통해서 받아들인 것이 아니면 아무 값어치도 없다."

그래, 옛말에도 "보지 않은 것을 말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가보지 않고서 알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모무하다면 무모한 일을 실천한 것이 대한민국의 10대 강 도보 답사 계획이었다.

첫 번째 어느 강을 먼저 걸을까? 그때 우연처럼 필연처럼 만난 사람이 군산 하천연구회 사무국장인 김동수씨였고 김재승 회장이었다. 금강을 열 나흘, 섬진강 아흐레, 영산강 닷새, 낙동강 열엿새, 한강 열엿새에 걸쳐 걷고, 한탄강, 만경강, 동진강, 압록강과 두만강, 대동강의 일부를 걸었으며, 그 뒤로도 한국의 오대 강을 다섯 번씩 걸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10대 강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은 어디일까? 낙동강 천 삼백리 구간 중 봉화의 석포에서 청량산 지나 도산서원까지 가는 길도 아름답고, 섬진강 5백 삼십리 물길 중, 임실 회문산 자락에서 순창의 구미리까지 가는 길도 아름답다. 비단 강인 금강의 진안 무주 부근도 아름답고 영산강의 담양읍 부근도 아름답지만  한강의 정선 광하리에서 영월읍까지 이르는 동강이 더없이 아름답다.

정선 동강(신정일 기자)
정선 동강(신정일 기자)

조선 시대의 문장가인 김일손의 글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과 헤어지는 것과 같아서 열 걸음을 걸어가면서 아홉 번을 뒤돌아봤다." 라는 구절이 떠오르는 구간이 동강 부근에서도 연포마을에서 문산까지 이르는 칠족령 옛길이다.

한강 천 삼백리 물길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인 칠족령을 발견한 것은 2005년이었다. 

2001년 한강을 처음 걸을 때는 칠족령 옛길이 있는 줄을 모르고 연포마을을 지나 거북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고 배를 타고 동강을 건넜는데 한강을 걷고 난 뒤 썼던 '한강 역사문화탐사' 에 실린 글을 보자.

동강을 아래에 두고 소사마을 거쳐 연포로 가는 길은 지루한 산길을 돌아가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연포 비지정 관광지 3km. 그 멀고 먼 고갯길을 넘어서야 연포마을에 닿았다.

 연포마을 앞 동강에는 세 개의 뼝대(뼝창이라고도 불리는데 깎아지른듯한 선돌을 일컫는다)가 연달아 서 있는데 흡사 작은 마이산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곳 연포에는 열 집 정도가 살았다는데 지금은 이해동씨 한 집만 살고 있다. 푸른 나무숲 사이로 작은 동굴이 보이고 운동장과 교실 세 개가 있는 연포초등학교가 있었는데, 99년에 폐교가 되었다.그곳에서 촬영한 영화가 차승원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선생 김봉두' 였다. 

우리가 걸어가는 산은 참으로 깊고 깊다. 이렇게 깊은 산골이라서 조선 연산군 때의 풍류객인 성현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을 것이다.

 "피곤한 말이 실 같은 가는 길을 뚫고 가기를 근심하니 어지러운 산봉우리들이 높고 깎아지른 듯하여 겹으로 된 성과 같구나. 바람이 바위틈에서 나오니 대포의 수레가 구르는 것 같고, 물이 마을을 안고 흘러 한 필 흰 비단 가로놓은 것 같다. 몸은 이 세상 백 년에 두 귀밑이 희어졌고, 물과 산 천리 길에는 벼슬살이하러 다니는 심정이 서럽구나. 난간에 의지해 앉아 동산의 달을 기다리노니, 밤이 고요하여 시 생각이 오랠수록 더욱 맑아진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떼돈을 벌었던 떼꾼들은 사라지고

 아랫길로 갈까? 윗길로 갈까?  망설이다가 윗길로 오르자 집 한 채가 나타나고 먼저 갔던 김현준 씨가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휴! 오늘 잠잘 곳은 저 집인가. 놉(인부)을 얻어서 고추를 심었다는 거북이마을 정광섭 씨 댁에는 몇 사람이 앉아 김치전에 소주 한 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정선 동강(신정일 기자)
정선 동강(신정일 기자)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6반 연포. 동강댐 수몰지역이라서 집의 개보수는 물론 무엇 하나 고치지 못했다는 정광섭 씨의 집은 내가 어릴 적 살았던 고향집을 떠올리게 한다. 외양간에선 두 마리의 소가 정답게 여물을 먹고 있고 전기가 들어온 지도 불과 3년이라고 한다. 정광섭 씨 집의 부엌은 지금도 장작불을 때고 있다. 

 느닷없는 손님들이 닥치자 영월 읍내에 살고 있다는 큰딸이 돌을 갓 지난 애를 등에 업고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방을 치우고 소죽을 끓이는 큰 솥에다 물을 가득 부어놓고 장작불을 때기 시작한다. 저녁밥은 금세 나왔다. 취나물에다 여러 가지 고기를 넣고 끓인 매운탕. 그중에서도 일품이 민물고기조림이었다. 쫀득쫀득하면서 감칠맛 나는 조림맛의 비결은 불에 약간 구운 뒤 조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밥을 먹고 나서 김형곤 씨가 장작불 앞에 자리를 잡는다. 정광섭 씨는 자연스레 말문을 연다. 

"저는 동래 정씨고요, 저 건너 가정리에서 살다 스물세 살 때 와서 벌써 38년이 됐네요. 너무 오래 살았지요. 떼배는 젊어서 많이 탓지요. 물이 작을 때에는 영월까지 가는 데 여러 날 걸리지만 물이 많을 적에는 아침 먹고 떠나면 점심때쯤에는 영월에서 돈 받아 가지고 돌아오곤 했어요. 여그서 세 바닥을 만들어가고 영월 가서 또 한 바닥을 만들어가지요. 보통 너이 가요. 앞에 서는 사공을 앞이라 하고 뒤에 있는 사공을 뒤미라고 불렀지요. 앞에는 기사, 뒤에는 조수라고 부를 수 있는디 앞사공이 기술자였어요."

 내가 뗏사공들 돈벌이가 그만큼 좋았기 때문에 떼돈을 번다는 말이 생겼다는데 정말로 떼돈을 벌었느냐고 묻자 "그렇지요. 지금 돈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상상도 할 수 없는 돈을 벌었다고 해요. 열여덟, 열아홉에 뗏목을 탔는데 떼 타가지고 돈 벌어서 술값으로 다 나가고 순전히 재미로 했지요. 갔다와서 또 나무를 모아가지고 또 내려가고 그랬지요.

떼돈이라는 것이 뗏목(떼(群)와 목(木)이 합쳐진 말이다) 띄워서 번 돈이지 떼돈이 정말로 왕창 버는 돈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아우라지에서 여그까장 육십 리쯤 되는디 물 좋을 적에는 한나절이면 오지요.

그런데 황새여울이나 된꼬까리여울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거기 가면 굵은 바위들이 많이 있는데 바위마다 이름들이 있어요. 관일이가 뗏목을 끌고 가다 부딪쳐서 죽은 관일이바우 승문이가 부딪쳐 죽은 승문이바우 등 많이도 있어요. 두태바우여울을 지나면 된꼬까리여울이 있는데 저기서부터 영월까지는 여울이 없으니까 술집들이 잘 되었지요. 그래서 '황새여울 된꼬까리여울 떼를 지어놓고 만지에 전산옥이야 술판 차려놓아 아라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고 노래를 불렀지요." 

 문득 정광섭 씨의 주름진 얼굴에 그늘이 진다.

그 밤을 지내고 정광섭씨의 아내가 모는 나룻배를 타고서 절매마을에 닿았지만 사람이 없어서 우여곡절 끝에 동강을 건너 문희마을에 닿았었다.

그 절매마을에서 바라다보이는 곳에 백룡동굴이 있다. 백운산과 그 동굴을 발견한 정무룡씨의 이름자를 따서 지은 백룡동굴(白龍洞窟) 위 백운산 중턱으로 난 길이 칠족령 옛길이다.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과 평창군 미탄면의 경계에 있는 백운산은 높이가 883.5m에 이르는 산인데  "흰구름이 늘 끼여 있다고 하여 백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 사람들은 '배비랑산' 또는 '배구랑산'이라고도 부르며, 정선에서 흘러나온 조양강(朝陽江)과 동남천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동강(東江)을 따라 크고 작은 6개의 봉우리가 이어져 있다. 동강쪽으로는 칼로 자른 듯한 급경사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강이 구절양장처럼 이어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백운산 중허리로 이어진 칠족령은 동강이 산자락을 굽이굽이 감싸고 흐르므로 경관이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데 산행의 시작점인 제장마을과 연포마을은 동강을 건너야만 한다. 숲은 대부분 참나무 군락으로 이루어져 있고 정선군·평창군·영월군의 동강 일대는 2002년 6월 생태계보존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백운산 칠족령은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마하리와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를 잇는 고갯길로 총 길이 2.4km의 고갯길이다. 1808년(순조 8)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 에 평창 지역의 대표적인 고갯길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평창군오면지도' 에 칠족령이 구체적으로 표시되어 있어, 길의 존재와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 

제장마을에서 시작되는 길보다 연포마을에서 시작되는 길이 구절양장처럼 휘감아 도는 동강을 계속 바라보고 걷는 깎아지른 듯한 산길이다.

조선 오백 년 역사 속에 천재 중의 천재였던 매월당 김시습은 아름다운 광경을 만나게 되면 주저앉아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율곡이 지은 '김시습 전' 에는 그에 대한 글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사람 된 품이 얼굴은 못 생겼고 키는 작으나 호매영발(豪邁英發)하고 간솔(簡率)하여 위의(威儀)가 있으며 경직하여 남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았다. 

따라서 시세(時勢)에 격상(激傷)하여 울분과 불평을 참지 못하였다. 세상을 따라 저앙(低仰)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몸을 돌보지 아니한 채 방외(속세를 버린 세계)로 방랑하게 되어, 우리나라의 산천치고 발자취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명승을 만나면 그곳에 자리 잡고 고도에 등람(登覽)하면 반드시 여러 날을 머무르면서 슬픈 노래를 부르며 그치지 않고 불렀다.”

 

정선 동강(신정일 기자)
정선 동강(신정일 기자)

화담 서경덕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일어나서 춤을 추었고, 허균의 스승인 손곡 이달은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나는 어떤가? 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면서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먼 길을 걸어간다. 하여간 칠족령길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에 매월당이 넘었다면 몇 걸음 걷고 통곡하고, 몇 걸음 걷고 통곡하다가 여러 날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이 고개를 칠족령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은 "옻칠을 하던 선비집의 강아지가 발에 옻을 묻히고 도망가서 그 자국을 따라가보니 고갯길이 나왔고, 그 고갯길에서 바라본 동강의 풍경이 장관이었다 하여 '옻 칠(漆)'자와 '발 족(足)'자를 써서 이 고개를 칠족령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는 트레킹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전체 구간이 비포장 길로서 옛길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동강의 풍경이 아름답고 조선시대 옛길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서 2021년 12월 8일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지금도 한강을 걷는 사람들이나 그 어떤 길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경에 반한 사람들이 봄가을 할 것 없이 꾸준히 찾고 있는 길, 그 길을 다시 찾아가고 싶다.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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