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全州)를 두고 온전할  ‘전全’ 자 때문에 ‘온 고을’ 이라고 부르듯 광주(光州)는 '빛 ’광(光)‘를 따서 빛 고을' 이라고 부른다. 빛 고을 광주를 굽어보는 산이 광주의 진산인 무등산이다.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 에 "광주의 무등산(無等山)은 산 위에 긴 바위가 가지처럼 뻗은 것이 수십 개나 공중에 배열되어 있어 훌륭한 홀 같고(입석대를 말함) 산세가 지극히 준엄하여 온도를 위압한다.”고 실려 있다

무등산은 광주광역시 북구와 화순군 이서면 및 담양군 남면과의 경계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해발 1187미터에 달한다. 무등산은 높이를 헤아릴 수 없고 견줄 만한 상대가 없어 등급을 매기고 싶어도 매길 수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한다면 무등산의 무등은 불교와 인연이 있는 말로서 '반야심경'에서 부처가 절대평등의 깨달음 곧 ‘무등등(無等等)’을 말한 대목에서 유래된 듯 하며 절대평등의 무등은 평등이란 말을 쓸모없게 하는 완전한 평등을 뜻한다.

무등산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든 그저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듯하지만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큰 골짜기들이 여러 갈래로 있다. 무등산의 계곡으로 증심사계곡, 동조골, 큰골, 용추계곡, 곰적골, 원효계곡, 석곡계곡 등이 있으며 계곡마다 폭포와 암반들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광주의 진산 무등산

'신증동국여지승람' 35권 ‘광산현’ ‘산천’ 조에는 "일명 무진악 또는 서석산이라고 한다.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 척이나 된다. 산 이름 서석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그 유래를 밝히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제봉 고경명도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했다.

무등산 서석대(신정일 기자)
무등산 서석대(신정일 기자)

조선 초기 문신인 권극화(權克和)는 기문(記文)에서 "광산(光山)의 진산(鎭山)을 무등산이라 하고 혹은 서석산이라고도 하는데 그 형세가 웅장하여 모든 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산 동쪽에 암자가 있어 이를 규암(圭庵)이라 하고 그 곁에 서석(瑞石)이 겹겹이 서 있어 우러러 보는 자, 굽어보는 자, 누운 자, 일어난 자가 있고 또 무더기로 있는 자와 혼자 서 있는 자가 있어 높이가 수백 척이나 되고 사면이 옥을 깎은 듯하다. 그 서석이니, 규봉이니 한 것은 뜻이 대개 이것을 취한 것이리라. 물이 잔잔하게 돌 눈에서 쏟아져 나와 비록 마루어도 마르지 않는다. 옛날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이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비로소 정사(精舍)를 세워 보조(普照)와 진각(眞覺)이 공부하여 도를 얻어서 그 꽃다운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삼존석(三尊石)과 십이대(十二臺)를 보면 대개 이를 생각할 수가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무등산이 사람들에게 아름답다고 알려진 이유는 무등산이 펑퍼짐한 육산이면서도 산등성이 곳곳에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서 있기 때문이다. 천왕봉 남동쪽의 규봉과 남쪽의 입석과 서석, 세 암봉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비경이며 장불재 북쪽 약 800미터 지점에 솟아있는 서석은 저녁노을이 물들 때면 수정처럼 반짝인다 하여 수정병풍(水晶屛風)이라 일컬어지고 있다. 장불재 북동쪽 약 400미터 지점에 위치한 입석대는 선돌을 수백 개 모아놓은 듯 오묘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특히 입석대는 옛날부터 제천단(祭天壇)으로서 가뭄이나 전염병이 극심할 때 제를 지내던 신령스런 곳이다. 천왕봉 남동쪽에 위치한 규봉은 큰 바위가 세 개가 솟아 있다고 하여 삼존석이라 불리기도 한다.

무등산 입석대(신정일 기자)
무등산 입석대(신정일 기자)

무등산 정상에는 ‘정상3대’ 라 불리는 천왕봉, 지왕봉, 인왕봉 세 개의 바위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왕봉은 무등산의 최고봉답게 전라북도 순창뿐만 아니라 광주, 담양, 영암, 나주 등 호남 일원이 한눈에 들어오며 날이 맑은 날은 지리산까지 조망된다. 비로봉이라고 불리는 지왕봉 꼭대기의 뜀바위는 임진란 때 의병장인 김덕령 장군이 무술을 연마하고 담력을 키우기 위해 뜀바위를 건너뛰곤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반야봉이라고도 불리는 인왕봉은 세 개의 봉우리 중 가장 낮은 봉이다.

이렇듯 무등산은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예로부터 시인묵객의 발길이 끊일 날이 없었다.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1903년~1982년)은 '무등산기행' 에서 "해금강을 바다의 서석산이라고 하면 해금강을 본 이는 짐작할 것이다. 돌을 돌이라 부르지 않고 서석이라고 부른 것은 예찬의 뜻이 벌써 거기를 표한 것이지만 나는 그 예찬을 과하게 보려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부족하게 보고 있다"고 격찬했다.

산 우는 소리가 수십리까지 들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산현’ 편, ‘산천’ 조에 "하늘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고 쓰여 있으며 같은 책 ‘사묘’ 조의 ‘무등산신사’ 에는 "신라 때는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가의 제(祭)를 올렸다. 동정원수 김주정이 각 관청의 성황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차례로 신의 이름을 불러 신의 기이함을 경험했다. 그런데 이 광주의 성황신이 원수의 큰 기의 방울을 올린 것이 세 번이었다. 그래서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하여 지위를 봉했다. 본조(조선)에 와서도 춘추로 본읍에 명하여 제사를 올리도록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대동지지'에도 신라, 고려, 조선의 제사를 벌인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육당 최남선은 '심춘순례' 에서 입석대를 ‘천연의 신전’ 이라 했고 전라도 지방의 전통종교의 중심지로 산 전체가 당산 터며 ‘무당산’ 이라 불렀다고 기록했다. 한편 무등산 신사 터를 천제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속설에 무등산곡이 있는데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아서 백성들이 믿고 평안히 살면서 즐거워 부른 것이라 한다"고 쓰여 있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무너진 뒤에 백제유민의 한이 가세하여 무등산은 백제유민들의 가슴속에 신의 산으로 스며들었을 것이다.

무등산 증심사(신정일 기자)
무등산 증심사(신정일 기자)

고경명(高敬命, 1533년~1592년)이 지은 '유서석록' 에는 "천관, 팔전, 조개, 모후의 산들이 눈 밑에 있다" 하였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에는 "제주도의 한라산, 경상도의 남해, 거제도 등이 모두 눈 속에 들어온다"고 쓰여져 있다. 이렇듯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무등산에는 불교와 유교의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증심사와 원효사 등의 사찰과 수많은 암자들이 있는데, 무등산 최대의 사찰인 증심사에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131호) 등을 비롯한 여러 문화재들이 있으나 원효사는 이름 그대로 원효가 신라 때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공비토벌작전으로 소실되었다가 얼마 전에야 복구되었다.

무등산 충장사(신정일 기자)
무등산 충장사(신정일 기자)

무등산 북쪽을 ‘가사문화권’ 또는 ‘정자문화권’으로 부르는데 소쇄원과 식영정을 비롯한 여러 누정들이 즐비하고 김덕령을 모신 충장사 등의 역사유적이 여러 곳 있다.

광주의 동쪽에서 산 아래 펼쳐진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 일대를 굽어보는 산 이오랜 역사 속에 빼어난 문화유산이 많은 무등산에 여름이 오기 전 오르고 싶지 않은가?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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