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삼백 리 낙동강 변에 세워진 서원들이 여러 곳이 있다, 안동의 도선사원, 선산에 금오서원, 구미의 동락서원이 있는데, 경관이 가장 아름다운 서원은 달성의 도동서원이다. 

다람재에서 바라본 대구 도동서원(신정일 기자)
다람재에서 바라본 대구 도동서원(신정일 기자)

달성군 구지면 낙동강 변에 위치한 도동리에 김굉필을 모신 도동서원(道東書院)이 있다.김굉필(金宏弼)은 1454년(단종 2)~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喧堂)이다.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유(紐)이고, 어머니는 중추부사(中樞副使)를 지낸 승순의 딸이었다. 그의 선조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하였으며 증조부인 사곤(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여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義盈庫使) 소형(小亨)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어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었는데 할아버지 때부터 살아오던 정흥동에서 김굉필은 태어났다. 어린 시절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었던 그는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그를 보면 모두 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나이들면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김굉필은 경기도 성남(城南)과 미원(迷原) 등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주로 영남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 :처가), 성주의 가천(伽川 : 처외가)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소학’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이때부터'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일컬었다.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하였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하여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하였다. 평생토록‘소학’을 공부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하여‘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던 그는 나이 삽십이 넘은 뒤에야 다른 책을 접하였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한 그는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그 때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이유로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되어 나부참봉에 제수되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회천에 유배되었고 2년 뒤 순천으로 이배되었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학문을 전수하여 우리나라 유학사의 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때 연산군에 피화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뒤 사림파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구축과 인재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됨에 따라 그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그것은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하여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는 사우가 세워져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그의 문인들이 관계되어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세력에 의하여 그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뒤 그를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의 건의가 계속되어 1577년(선조 10)에는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10년(광해군 2)에는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하여 정여창(鄭汝昌)․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던 데 반해,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는 현실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를 따랐던 20 여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를 따랐던 후학들은 유배지 교육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김굉필은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경현록’․‘한훤당집’․‘가범 (家範)’등이 있다. 

1605년 선조(宣祖 38)에 창건한 도동서원에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을 봉안하였다. 그 두해 뒤에 도동으로 사액(賜額)되었으며, 1677년 숙종(肅宗 3)에 한강 정 구를 배향하였으며 1894년에 별사(別祠)를 세우고 곽승화, 원개, 배신, 곽율을 추배하였다.

한가히 홀로 있어 왕래를 모두 끊고,

밝은 달을 불러 내 고한(孤寒)을 비칠 뿐,

부탁하노니 그대는 생애의 일 묻지 말라.

만 이랑 흰 물결에 몇 겁의 산이 있네.

 

대구 도동서원(신정일 기자)
대구 도동서원(신정일 기자)

 

김굉필의 시 한 편이 바람결에 떠도는 도동서원 앞에는 가진면 구곡리로 건너는 도동나루가 있고 마을 뒤 절골에 있는 정수암(淨水庵)은 김굉필이 시묘한 것을 기리어 후학(後學)들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절골 뒤에는 동꿍샘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물의 양의 가물 때나 장마 때나 한결같이 나오는데 이 물을 마시면 속병이 낫는다고 한다

한가함보다 더한 즐거움은 없다

도동마을에서 뒤돌아 본 낙동강은 푸른 실타래를 풀어놓은 듯 아름답기만 하다. 나는 도동마을 낙동강이 내려다 뵈는 빈집에 세워져 있는 대나무 간짓대로 잘 익은 홍시 두 개를 따먹는다. 감칠맛나게 목에 착착 감기는 이 맛을 무어라고 표현하랴 강 건너 개포나루에는 배가 두척 매어져 있고 바라다 뵈는 개포와 구곡동 일대에서는 나라 안에 제일가는 진흙이 나온다. 그래서 옛날부터 기왓굴로 이름이 나 마을 이름도 와나루(와진) 기왓굴로 불리우고 있다.

802년 애장왕 때에 창건한 합천 해인사의 기와도 이곳 개포 일대에서 만들었다고 하고 남대문이나 경주 불국사, 강릉 오죽헌, 안동 도산서원의 보수 때도 이곳에서 만든 기와를 썼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어진 기와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1600여 년 전쯤인 한사군 때라고 한다. 한편 강화도에 있던 팔만대장경이 인천 거쳐 부산으로 옮겨진 뒤 낙동강 물길을 따라 이곳 개포에 도착한 뒤 합천 해인사로 옮겨졌다. 그 당시 영남지방의 스님 1천여 명이 머리에 경판을 이고 줄을 지어서 해인사로 날랐다고 하니 팔만대장경에 걸었던 기대가 얼마나 컸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도동서원 문앞(신정일 기자)
도동서원 문앞(신정일 기자)

 

사람은 가고 없어도 강물은 흐르고, 도동서원 앞 은행나무는 지금도 푸르고 푸르니,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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