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신정일 기자)
숭례문(신정일 기자)

우리나라 국보 1호는 서울의 숭례문이다. 서울 남대문에는 문턱이 없다. 그런데도 “남대문 문턱이 대추나무라고 한다”는 속담이 있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는 말로 우김질을 한다는 말이다. 그런 속담에도 등장하는 숭례문은 근현대화 속에 빌딩 숲에 갇혀 외롭게 서 있다가 2008년에 어이없는 방화로 인해 소실되고 말았다. 

숭례문은 도성의 4대문과 4소문 중에 남쪽으로 나 있는 정문(正門)이었다. 조선 태조 7년에 평양감사를 지낸 조준(趙浚)이 감독하여 창건된 서울 성곽 중 정남쪽 문이 숭례문이다. 이 문의 처마는 상하층 모두 겹처마이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끼웠다. 

1962년 이 문을 해체할 때 발견된 상량문의 명문에 의하면 본래 지붕은 팔작지붕이었으나, 훗날 우진각지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형태의 숭례문이 다시 지어진 것은 세종 30년(1448년) 5월이었다. 당시 세종이 이 문을 재건하려 있던 이유가 '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 21일에 실려 있다.

“경복궁의 오른 팔은 대체로 모두 산세가 낮고 미약하여 널리 헤벌어지게 트이어 품에 안는 판국이 없으므로, 남대문 밖에다 못을 파고 문안에다가 지천사(支天寺)를 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나는 남대문이 이렇게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땅을 파서 평평하게 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제 높이 쌓아 올려서 그 산맥과 연하게 하고 그 위에다 문을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청파역(靑坡驛)에서부터 남산에까지 잇닿은 산맥의 여러 산봉우리들과 흥천사(興天寺) 북쪽 봉우리 등처에 소나무를 심어 가꿔서 무성하게 우거지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숭례문은 '태조실록' 태조 7년 2월 8일에 “도성 남문이 완성 되어 임금께서 납시어 살피시었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태조 7년(1398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숭례문이라는 글씨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에 “양녕대군이 현판 글씨를 썼으며, 민간에서 남대문이라 부른다”라고 실려 있고, 이수광이 지은 '지봉유설(芝峰類設)' 에 "세종대왕의 큰 형님인 양녕대군이 썼다" 라고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현판을 임진왜란 때에 잃어버렸다. 그 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광해군 때 어느 밤에 남대문 밖 청파 배다리 개천 가운데 밤에 서기가 뻗쳐올랐다. 기이하게 여겨서 파보니 이 현판이었다. 그래서 다시 걸었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썼다는 설도 많이 있다. 

정조와 순조 때를 살았던 정동유(鄭東愈)는 '주영편' 이라는 책에 “숭례문의 글씨는 명종 때에 판서를 지낸 유진동(柳辰仝)의 글씨로써 양녕대군의 글씨가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자꾸 양녕의 것이라 믿으니 그것은 큰 잘못이다” 라는 글을 남겼다. 정동유의 말이 사실이라면 본래 숭례문 글씨는 양녕대군이 썼지만 그 글씨가 훼손되자 유진동이 다시 써서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숭례문’ 이라는 글씨를 좋아했던 사람이 바로 천하의 명필이라고 알려져 있는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다. 그는 '완당집' 에 “숭례문 편액은 신숙주의 아들인 신장(申檣)의 글씨인데 깊이 구(歐)의 골수에 들어갔다” 라고 썼다. 추사가 과천에서 오고 갈 때면 항상 이 문 앞에서 황홀한 눈빛으로 해가 저무는 줄도 모르고 ‘숭례문’ 이라는 글씨를 쳐다보고 또 쳐다보았다는 일화도 있다. 

 

서울 남산(신정일 기자)
서울 남산(신정일 기자)

지금은 남대문이 밤낮으로 항상 열려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밤이 되면 사대문을 닫고 통행을 막았다. 그래서 밤에는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성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1796년 1월 24일, 정조가 화성에 능행을 갔다가 조금 늦게 들어왔는데 숭례문이 열리지 않아 길가에 어가를 세우는 변고가 일어났다. 

그때의 일이 '정조실록' 정조 20년 1월 24일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상이 돌아오다 만천(蔓川)에 이르러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성문이 먼저 닫혀 있어 어가가 노차(路次)에 머물게 되었으므로, 수궁 승지(守宮承旨) 신기(申耆·)이경운(李庚運), 병조 참의 이우진(李羽晋)을 파직하였다. 그런데 옥당의 여러 신하들이 차자를 올려 그들을 찬배하기를 청하니 따랐다. 인하여 유도 대신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를 파직하였다."

그 다음 날인 정조 20년 1월 25일에도 그와 연관된 글이 실려 있다. 

우의정 윤시동이 차자로 청하기를 “병방 승지 이익운(李益運), 병조 판서 이득신(李得臣), 선상 대장(先廂大將) 서용보(徐龍輔)는 아울러 삭출하고, 수궁 대장(守宮大將) 정호인(鄭好仁)을 파직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는데, 역시 성문을 지레 먼저 닫은 일 때문이었다.

조선 500년 역사 속에서도 성군 중의 성군이라고 일컬어진 정조 역시 자기 자신에게는 관대했음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당시 일반 평민들은 대부분 한강을 건넌 뒤에도 밤이 늦으면 사대문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용산구에 있던 이태원이나 성동구 사근동에 있던 살곶이원 또는 청파역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일제 36년을 겪으면서도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숭례문, 즉 남대문에서 조선의 모든 길은 시작되었다. 외국에서 온 사신들 중 이 문을 통과하는 사람은 중국 사신뿐이었고, 왜국의 사신들은 반드시 두무포(옥수동) 나루로 한강을 건넌 뒤 시구문이라 불리는 광희문을 거쳐 도성에 들어왔고, 여진족 사신은 동소문, 곧, 혜화문을 통해서만 도성에 들어올 수 있었다. 

서울 남산(신정일 기자)
서울 남산(신정일 기자)

남대문 근처에 있던 남지 터

숭례문 근처에 서울 남쪽에 있는 연못이라는 이름의 남지(南池)가 있었는데 없어졌던 것을 성종 14년(1483년)에 한명회가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다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신이 듣기에 한양에다 도읍을 정할 때에 모화관 밖에 서지(西池)를 숭례문 밖에 남지를 파서 풍수에 의한 화기를 진압했다고 들었는데, 세종 8년 이래 한양에 큰 불이 멎질 않으니 지금은 메워지고 없는 이 남지를 다시 파 이 화기를 잡아봄이 좋을 듯하옵니다."

이 남지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남지 연못의 연꽃이 무성하면 남인들이 흥하고, 서대문 밖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던 모화관(慕華館) 근처에 있던 서지(西池)의 연꽃이 무성하면 서인들이 흥하며, 동지(東池)에 연꽃이 무성하면 동인들이 흥한다는 말도 있었다. 

순조 때 남대문 밖의 장사꾼들이 추렴하여 메워졌던 남지를 파고 물을 담자 항간에 다음과 같은 참요(讖謠)가 떠돌았다.

허미수(許眉叟) 우의정이 되었을 때

남지를 준설하였더니

이번 순조 때 준설이 또한

바로 그때 그날이라네.

채제공(蔡濟恭)이 다시 우의정 되어

일인지하 영의정에 올랐으니

남대문 밖 저 남지는

남론인(南論人)을 돕는다네.

그 참요는 지금도 남아 전하는데, 숭례문 근처에 그때 그 연못은 흔적조차 없고 오직 남지 터라는 표지석만 남아 있고 남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자동차들만 줄지어 달려갈 뿐이다.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더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