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벽정 (사진= 신정일 기자)
함벽정 (사진= 신정일 기자)

아름다운 정자 함벽정과 왕궁저수지

사람들이 흔히 말한다.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맞는 말이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가면 도처에서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천 년의 역사 속에 수없이 명멸해간 사람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남아 있어서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로 무언의 침묵으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 곳곳 어디에서나 자연 속에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돌멩이 하나, 나뭇가지 하나, 한 포기의 풀조차도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 땅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에서 나는 감동을 받는다.

그 중에서도 시냇가나 바닷가, 혹은 아름다운 호숫가에 있는 정자에 올라가서 보면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내 마음에 드는구나.“ 라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한 소절이 떠오르며, 세파에 지친 마음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이 되는 듯하다.

옛사람들이 풍류를 즐기고 학문을 연마했던 누정(樓亭)을 두고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함께 일컫는 명칭이다. 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마루바닥을 지면에서 한층 높게 지은 다락식의 집인 누정을 이규보는 그가 지은「사륜정기(四輪亭記)」에서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사방이 확 트이고 텅 비어 있으며 높다랗게 만든 것이 정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누정 조’에 의하면 누정은 루(樓), 정(亭), 당(堂), 대(臺), 각(閣), 헌(軒), 재(齋)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누각(樓閣)은 2층으로 되어 연회를 베푸는 정자인데, 누각처럼 규모가 큰 정자가 익산시 왕궁면 왕궁저수지에 있는 함벽정(涵碧亭)이다.

왕궁저수지 (사진= 신정일 기자)
왕궁저수지 (사진= 신정일 기자)

왕궁저수지는 우북산(紆北山)과 도순산 계곡에 있는 저수지로, 원래 이 자리는 제주에서 서울까지 이어지는 삼남대로가 지나는 길목이었다. 삼례에서 이곳을 지나 쑥고개를 넘어 여산으로 이어지던 삼남대로 길목에 면적이 넓은 큰 저수지가 들어선 것이다. 주변의 연지(蓮池)는 중국에서 처음 가져온 백련(白蓮)을 심어 조성한 것으로 이곳에 있는 함벽정은 일제 시대에 익산 지역의 부호 송병우가 지은 정자다.

지금은 강남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성종의 묘인 선릉 참봉을 지냈던 송병우는 왕궁수리조합장을 역임하면서 왕궁저수지를 조성할 때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로, 지역의 교육사업과 사회봉사에 많은 힘을 쏟았다. 기미년인 1919년에는 익산 근처에 흉년이 들자 곡물을 풀어 기근에 허덕이는 주민들을 보살폈으며, 후학을 양성하기 이해 사재를 털어 왕궁초등학교, 삼기초등학교, 전주인후초등학교를 설립하고 많은 땅도 희사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왕궁과 삼례를 잇는 도로를 처음 만들었고, 그 외에도 지역 사회를 위해 여러 가지 훌륭한 업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당시의 업적을 기리는 공적비와 준공기념비 3기가 함벽정 입구에 세워져 있어서 그 역사를 전해주고 있다.

이 정자는 1930년 왕궁저수지가 완공된 후 그 둑과 수문 사이에 높이 50m 정도의 암대(巖臺)가 생기자 이곳 출신인 송병우(宋炳雨)가 저수지의 완공을 기념하고 경치를 감상하기 위하여 사재를 들여 1937년에 창건한 정자다.

송병우가 지은 함벽정은 규모 면에서나 건축형식으로 볼 때 누각처럼 큰 규모인데, 1986년 9월 8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함벽정의 정자 이름은 남송 시대의 대학자인 주희(朱熹)의 시 구절 중 '일수방함벽 천림이변홍(一水方涵碧 千林已變紅 ; 한 줄기 강물 막 푸르러지려니, 많은 수풀 이미 붉게 바뀌었구나)을 차용해 지었다고 한다. 이 누각 안에 들어서면 푸른빛이 감도는 저수지의 맑은 물이 한눈에 들어오고 선선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물밀 듯 파고든다.

함벽정 (사진= 신정일 기자)
함벽정 (사진= 신정일 기자)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누정인 함벽정은 이중 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잘 다듬은 북 모양의 주춧돌을 사용하고 위에 원형 기둥을 올렸다.

건물 내부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바깥쪽으로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가운데 6칸은 사분 합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개방하거나 문을 닫아 실내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기둥 상부에 짜여진 공포(拱包)는 이익공계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평주(平柱) 위 공포의 쇠설(牛舌)이 전면으로만 돌출되는 데 비해 이 건물에서는 좌우 대각선 방향으로도 돌출시켜 마치 귀 기둥에서의 공포결구수법(貢包結構手法)과 같이 짜여져 공포를 더 화려하게 꾸몄는데, 우리나라 건축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함벽정의 지붕은 옆에서 볼 때는 여덟팔자(八字) 모양의 팔작지붕인데, 측면은 두 가지 색의 벽돌을 사용하여 쌍희 희(囍) 자로 장식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로 꾸몄고, 추녀 하부에는 활주를 세워 받쳤으며, 건물 전체에 연꽃과 동물, 그리고 온갖 불과 꽃으로 단청하여 외양이 화려하다.

함벽정에는 현판 3개와 편액 4개가 걸려 있느데, 외부의 “함벽정” 현판은 전라도 도사(都事 : 감찰관)를 지냈던 벽운 유재호(璧芸 劉載鎬) 라는 사람이 해서로 썼고, 뒤편 왕궁저수지 방향에서 본 현판은 이조판서를 지냈던 석촌 윤용구가 행서로 썼다. 내부에는 당시 이 정자를 다녀갔던 문인들과 서예가들이 남긴 현판과 편액이 걸려 있다. 그 중 전서체로 쓴 "표정청경(瓢庭淸境)"의 현판은 김제출신의 명필 설송 최규상(雪松 崔圭祥, 1891~1956)이 썼으며, 1937년 김녕한(金寗漢)이 쓴 함벽정기(涵碧亭記)의 기문(記文) 외에 3편의 시문 편액이 걸려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이 정자에서 <문기유림>에 실린 시 한 편을 떠 올려도 좋으리라.

한가한 사람이 아니면 한가함을 얻지 못하니,

한가한 사람이 바로 등한한 사람은 아니라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즐거움이 한가한 가운데 산수 사이를 노니는데 있는 줄을 모른다. 오직 권력과 부를 모으는 곳에 있다고 여기면서 재산을 불리거나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더구나 쓸 줄은 모르고 모을 줄만 아는데, 그것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더 많이 쌓아 놓기 위해, 아니면 자식들을 위해, 한가한 한때도 보내지 못하고 모으고 또 모은다.

그러나 그렇게 전력을 기울여 모으고 차지한 재물과 권력을 어느 한 사람이라도 가지고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아니다. 진시황도 나폴레옹도 그 무엇도 가지고 가지 못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한가롭게 보내는 행복한 한 순간도 보내지 못하고 아등바등 살다가 쓸쓸히 돌아가는 것이다.

이 정자에 앉아서 흐르는 시간을 잊고, 자신을 천천히 돌아보아도 좋으리라.

벚나무가 정자 주변에 많이 심어져 있어서 봄이 화려한 이곳 함벽정에서 멀지 않은 익산시 왕궁면 광암리 554-1에 있는 송병우의 생가는 현재 왕궁다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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