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향원정 (사진=신정일 기자)
경복궁  향원정 (사진=신정일 기자)

고려시대의 남경 터에 경복궁을 세우다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개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조선 건국의 주역 삼봉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지었다. 이 글에서 정도전은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제시한 것으로 이를 통해 국가 기강을 세우고 운영체계를 확립하고자 했다. 정도전은 통치체제로는 중앙집권, 통치철학으로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그 기저로 내세웠다.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나라이름(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정한 것은 기자 조선을 계승하기 위함이라 밝혔다. 정도전이 어찌 하여, ‘단군조선(檀君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 ‘기자조선(箕子朝鮮)’ 세 조선 중에 기자조선을 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이름을 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조선이라는 말은 날이 샐 때 맨 먼저 햇볕이 쏘인다는 뜻으로 ‘첫’이란 말과 ‘샌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훗날 한문이 들어오면서 소리와 뜻이 비슷한 아침 ‘조(朝)’와 ‘밝을 선(鮮)’의 두 자를 빌어서 쓴 것이다.)

오직 조선이란 칭호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그 유래가 구원하다.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하늘을 체 받아 백성을 다스리면, 후손이 길이 창성하리라.

그리고 정도전은 다음과 같은 대원칙을 정했다.

대저 군주는 국가에 의지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백성은 국가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군주의 하늘이라고 천명한 정도전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중심사상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인군人君의 지위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일 천하 만민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우려할 만한 일이 생긴다. 민은 지극히 약한 존재이지만 폭력으로 협박해서는 안 된다. 민은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이지만 꾀로써 속여서는 안 된다.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민이 인군에게 복종하고 인군을 버리는 데는 털끝만큼의 차이밖에 없다.

그러나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사심을 품고서 구차하게 해서도 안 되고 도를 어기어 명예를 구해서도 안 된다. 그 얻는 방법은 역시 인으로써만 해야 한다. 인군은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씨를 자기의 마음씨로 가지고 차마 함부로 할 수 없는 마음씨로써 정치를 행해야 한다.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 고려의 도읍지인 개성의 수창궁 화평전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 뒤 1394년 8월에 친히 남경의 옛터를 돌아본 뒤 지관인 윤신달에게 물었다.

“이곳이 어떤가?”

“윤신달이 대답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송경(개성)이 으뜸이고, 이곳이 다음 가는 것입니다. 단지 이곳이 유감인 점은 서북쪽에 낮고, 명당수가 고갈하여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들은 태조가 기뻐한 뒤 말했다.

“송경인들 어찌 부적한 것이 없으랴만 지금 보니 이 땅의 형세는 참으로 왕도로서 모자람이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은 뱃길이 편하고 땅이 고르며 인사(人事)에도 또한 편리함이 많지 않겠는가.”

태조가 다시 왕사인 무학에게 그 땅이 어떠냐고 묻자 무학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땅은 사면이 높고 중앙이 평탄하여 성읍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좇아서 결정하십시오.”

태조가 다시 여러 재상들에게 물었다.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모든 대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반드시 천도하실 바에는 이곳의 지형이 가장 좋을 듯합니다.”

 

서울 근정전 (사진=신정일 기자)
서울 근정전 (사진=신정일 기자)

 

태조는 보름간 서울에 머물며 판문화부사 권중화(權仲和), 정도전(鄭道傳), 청성백 심덕부(沈德符),등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새로운 서울 건설 계획을 세우도록 하였다.

그때 궁궐이 들어설 지역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여 종묘와 사직단을 어느 곳에 세우고 궁궐과 관청 및 시장 등을 어떻게 개설하며. 도로를 어떻게 뚫을 것인가를 논의하였고, 경복궁을 지을 자리가 정해졌다. 경복궁의 자리는 원래 고려 숙종 때에 지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터였는데, 그 때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자고 했던 사람은 도참술사인 김위제(金謂磾)였고, 그는 남경의 산세가 다섯 가지 덕德이 있어서 길한 곳이라고 하였다.

중앙에 면악(面嶽)이 있어서 둥근 모양으로 되었으므로 토덕(土德)을 상징한 것이고, 북쪽에 감악(紺嶽)이 있어서 굽은 모양으로 되었으니, 수덕(水德)을 상징한 것이며. 남쪽에 관악이 있어서 뾰족한 모양이 되었으니 화덕(火德)을 상징한 것이요, 동쪽에 양주 남행산이 있어서 곧은 모양으로 되었으니, 목덕(木德)을 상징한 것이고, 서쪽에는 수주(樹州)의 북악이 있어서 네모난 모양으로 되었으니 금덕(金德)을 상징한 것이다.“

<고려사> 권 122 열전 35, 방기 김위제,

그러나 그 이궁이 들어섰던 자리가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한 발 더 남쪽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해산(亥山) 곧, 북북서 쪽에 있는 산을 주산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앉혔다. 그 자리가 바로 고루 평평한 땅이었고, 그 앞의 지세는 마치 용이 읊조리고 있는 형국으로 지금의 경복궁 자리다.

그 뒤 옛 법도를 따라 종묘는 왼편에 앉히고, 사직단은 오른쪽에 지어야 한다는 ‘좌묘우사(左墓右社)’의 법식에 따라 종묘를 왼편에, 사직단을 오른 편에 세웠다.

이성계는 잘 계획된 도면을 토대로 천도를 거행 한 뒤 11월 2일에 종묘와 사직단이 어설 자리를 살핀 뒤 임시 관서인 공작국을 설치하였다. 그 뒤 정도전으로 하여금 <황천후토신(皇天后土神)>에게 새로운 서울의 건설을 알리는 기공식을 하고서 다음의 고사문을 바쳤다.

만물이 생기고 성장함은 하늘과 땅의 힘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제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 도읍을 세워 나라의 서울을 만들려 하옵니다.

송도는 그 지세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쇠퇴하였으므로 화산(華山, 북한산)의 남쪽 햇빛 바른 양지, 형세도 길한 이곳에 새로운 도읍을 세우고자 바야흐로 큰 역사(役事)를 일으킵니다.

이에 혹 백성들이 피곤하고 지칠까 염려되오니 황천후토신께서는 이 마음을 깊이 살피시어 맑은 날을 계속 개이게 하시고 때에 따라 비도 내리게 하셔서 공 드리는 공사로 큰 도읍을 꾸미는데 큰 힘이 되게 하소서. 위로는 천명(天命)이 무궁하도록 베푸시고, 아래로는 민생(民生)을 영원토록 보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날이 태조 3년(1394) 11월 3일이었고, 서울이 조선의 수도이자 오늘날의 수도의 첫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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