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천대 (사진=신정일 기자) 
자천대 (사진=신정일 기자)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자천대

군산시 옥구읍 상평리 동문 밖에 있는 옥구 향교 앞에 자천대自天臺가라는 정자가 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이 당나라에서 학문을 닦고 돌아왔을 때 세상이 몹시 혼란하고 민심이 흉흉하자 홀로 바다를 바라보며 독서로 시름을 달랬다는 곳인데, 최치원의 탄생설화가 서린 곳이다.

신라 시대의 문장가인 최치원의 아버지가 오식도에 설치된 수군부대에 관리로 파견되어 있을 때의 일이다. 최치원의 어머니가 돼지머리를 한 괴물에게 납치 되어 갔다가 군산 앞바다에 있는 내초도의 금돼지굴에서 사내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최치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경주최씨를 돼지 최씨라고도 부른다. 최치원은 화산 근처에 있던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고 글을 읽었는데, 글 읽는 소리가 당나라의 황제에게까지 들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 바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하며, 이곳 해변의 모래사장에서 최치원이 손가락으로 글씨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자천대 서쪽 해안에 있는데, 지세가 넓고 편편하며, 샘과 돌이 좋아 즐길만하다, 세상에 전하기는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누정 조에 실린 글이다.

원래 자천대는 지금의 군산 비행장 자리에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 말에 옥구군 유생들이 옥구읍 상평리 향교 옆으로 옮겼다. 옮기기 전의 자천대를 이곳 사람들은 원 자천대라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원자천대의 최치원이 앉았던 바위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국과 멱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전설이 있는데, 이중환이 《택리지》에 기록한 내용은 그와 다르다.

자천대라는 작은 산기슭이 바닷가로 쑥 나왔고, 그 위에 돌로 된 두 개의 돌 농(籠)이 있었다. 신라 때의 최고운(崔孤雲)이 이 고을의 원이 되어 와서 농 속에다 비밀문서를 보관하였다는데, 농이란 것이 마치 큰 돌과 같았다. 산기슭에 버려져 있었지만 누구도 감히 열어보지 못하였고, 혹 이를 끌어 움직이면 바다로부터 바람과 비가 갑자기 왔다. 마을 백성은 이 농을 이롭게 여겨서, 날씨가 가물 때 수백 명이 모여 큰 밧줄로 끌어서 움직이면 바다에서 비가 갑자기 와서 밭고랑을 흡족하게 적시었다. 그런데 사객(使客, 임금의 명을 전달하거나 시행하는 사람)이 옥구현에 올 때마다 번번이 가서 구경하게 되기 때문에 고을에 폐가 될까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이곳에 정자도 있었으나, 백 년 전에 정자를 허물고 돌 농도 땅에 묻어 자취를 없애 버려서 지금은 가서 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자천대는 원래 정자의 이름이 아닌 환산 인근의 바위산이었다고 한다. 화산 북쪽, 2km 지점, 지금은 사라진 중재마을 인근에 있던 3층 높이의 바위산을 그곳에 살고 있단 사람들은 자천대, 혹은 독서대라고 불렀고, 나무가 없는 붉은 산이었다고 한다. 산 정상에는 최치원의 무릎자국이 남아 있는 바위가 있었고, 어느 때 만들었는지 모르는 2층 정자가 있었고, 그 정자옆에는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옥구군 선연리의 동산에 있었던 자천대가 1934년 군용 비행장 안으로 편입되자 당시 유림들과 최학수 옥구 군수가 이를 옥구 향교로 옮기고 경현재(景賢齋)라 하였다가 1967년에 다시 건립하였다. 1984년 4월 1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16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옥구향교 대성전 (사진=신정일 기자) 
옥구향교 대성전 (사진=신정일 기자) 

자천대 옆에 자리잡은 옥구 향교는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으로 태종 3년인 1403년 옥구읍 이곡리(耳谷里)에 창건되었다. 성종 15년인 1484년에 상평리로 옮겼다가 인조 23년에 1646년에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옥구향교에 있는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문창서원 등의 전각이 있는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공자를 비롯한 5성, 송(宋) 4현과 한국 18현을 배향하고 있으며, 1984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향교의 부속 건물인 외삼문, 내삼문, 교직사 등이 있으며, 명륜당과 전사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양사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단군성전 (사진=신정일 기자) 
단군성전 (사진=신정일 기자) 

향교 안에 단군을 모신 단군묘(檀君廟)가 있고, 그 옆에는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된 문창서원(文昌書院)이 있다.

신라 시대의 명문장가이면서도 나라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온 나라 산천을 떠돌아다닌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천대에서 그의 시 <가을비 내리는 밤(秋夜雨中)>이 떠올랐다.

가을 바람에 괴로워 애써 읊어도

세상에 내 마음 아는 이 없어.

창밖엔 밤 깊도록 밤비 내리고

등잔 앞에서 만리길 고향 그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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