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정일 기자)
(사진=신정일 기자)

관동대로 변에 있는 택풍당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에서 가장 큰 마을인 학둔지 마을은 지형이 학처럼 생겨서 지어진 이름이고, 학둔지 남쪽에 있는 마을은 사창社倉이 있어서 창말이며, 창말 서북쪽에 있는 택풍당澤風堂은 인조 때의 문장가인 이식李植이 살았던 곳이다.

이행(李荇)의 후손인 이식(李植, 1584~1647)의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호는 택당(澤堂), 자는 여고(汝固)이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덕수 이씨의 무맥(武脈)이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으로 이어졌고, 그 문맥(文脈)은 이식으로 이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빼어난 문장가가 바로 이식이었다.

인조 때의 문신으로 문장이 뛰어났던 이정구(李廷龜)·신흠(申欽)·장유(張維)와 함께 한문4대가 또는 사대문장가(四大文章家)라고도 부르며, 이들의 호를 한 자씩 따서 월상계택(月象谿澤)이라고도 부른다. 선조 때부터 인조에 이르기까지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 많은 문인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이들 네 사람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당송팔대가의 고문(古文)을 모범으로 삼은 점, 주자학적인 사고가 규범이 되고 있는 점, 이들 모두가 화려한 가문 출신이며 관료로서 출세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식은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경기도 지평(지금의 양평군 양동면)으로 낙향 한 뒤 남한강 변에 여섯 칸의 조그마한 집인 택풍당을 짓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의 호를 택당이라고 지은 것은 여기에 연유하였다.

(사진=신정일 기자)
(사진=신정일 기자)

여주의 북쪽 편에 자리 잡은 강구(康丘)마을에 실고 있던 이식은 화(禍)를 입을까 두려운 마음으로 서울로 갈까 하고 점을 쳤다. 그러나 췌괘(萃卦)가 송괘(訟卦)로 변하는 것을 보고 불길함을 느껴 호남으로 갈까 하고 전을 쳤으나 그 또한 불길하였다. 영남에 살면 어떨까 하고 점을 쳐도 불리하자 “갈 곳이 없구나.” 하고 탄식하고서 지평의 백아곡에 있는 선영(先塋)밑에 점을 치니, 대과괘(大過卦)가 함괘(咸卦)로 변하는 것을 만났다. 그 효사(爻辭)에 “마른 버드나무에 새싹이 돋아나고 늙은 홀아비가 잚은 부인을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라 하였다. 이것을 이식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거의 화를 면하였구나. 넘어진 나무에서 다시 싹이 닐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서 이곳으로 와서 살면서 남긴 글이 명문으로 회자되는 <택풍당지澤風堂志>이다.

처음에 지평이 땅이 메마르고 또 여주(麗州)의 경내이기 때문에 점을 쳐보지 않다가 길하다는 점괘를 얻고서야 비로소 여기에 살았다. 기미년(광해 11. 1619)에 와서 작은 당(堂)이 이루어짐에 이로 인하여 현판을 다니, 당의 모양이 누와 같았다. 높이는 16척으로 가운데 한 간은 방을 만들고, 기둥을 따라 중간 정도까지 흙을 쌓아 올려 굴뚝을 만들고 창과 벽을 두었으며, 벽밖에는 네 기둥을 터서 3 간 마루를 만들고 판자를 깔아서 헌함을 만드니, 높이는 굴뚝 높이 정도로 넓이는 반이요. 길이는 그 배이며, 아무 막히고 가리 워 진 것이 없어서 빙빙 돌면서 바라보기에 좋다.

헌함 아래 동편은 땅이 낮고 질어서 샘물을 끌어다 네모진 못을 만들고, 못 가운데는 조그마한 흙더미를 두어 버들을 심었다. 당의 안은 꽉 차고 밖은 텅 비어 있으며, 못 가운데는 나무가 있으니, 다 택풍(澤風)의 상(象)이다. 방안의 벽 끝에는, 64괘와 그 상사(象辭)가 있으며, 남쪽 창 양쪽 곁에는 대과괘의 상사 8자를 크게 써 두었다.

당의 만듦새가 소박하고 간략하여, 지붕은 목피(木皮)로써 깎아 덮었을 뿐이다. 백아곡은 만첩산중에 있고, 당은 또 백아의 골 안에 있으니, 사방이 둘러 싸여 마치 분앙(盆盎)과 같다. 소나무와 삼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며, 낮고 진 곳에는 능수버들이 만ㄹ으나 아름다운 돌과 기이한 돌들이 없으며 골 안에는 솟아나오는 샘물이 많아서 샘물 소리가 들을만하다. 동남 양쪽 언덕에는 선영(先塋)이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보고 사모하였기 때문에 당 안에서 비록 노래하고 술 마실 일이 있다고 해도 감히 잔치를 떠벌여 즐기지 아니하고, 책 약간 권을 놓아두고서 마을 학동 몇몇을 모아 글을 읽으며, 지루하면 계곡에 나와 냇물을 따라 올라가 목욕하고 돌아왔다.

생각해보건대 처음 여기에 와서 거처한 때로부터 오늘까지 12년이 되었다. 그 사이에 혹 나가서 벼슬하는 일도 있었으나 항상 왕래하며 머물러서 1년에 한 번도 오지 않는 때는 없었으나, 그,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근심하지 아니한다.‘는 뜻에 대해서는 아직 거의 체득을 하지 못하였다.. 아! 슬프다. 내가 중인(衆人)으로 돌아가고 신명(神明)을 버릴 것인가? 이 뜻을 서술하여 나의 허물을 기록하고 또 이것으로 뒷사람에게 보인다.“

이식은 이 글을 <주역周易> 대과괘(大過卦) 대상(大象)중에 나오는 “홀로 서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숨어 살아도 근심하지 않는다.” 라는 말로 글 전체의 구성을 일관되게 서술한 것이다.

이곳을 주제로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두고 온 서울에 대한 그리움과 찾는 이 없는데서 오는 쓸쓸함과 외로움이 많이 묻어 있다.

택당에서 묵으며 시사(時事)를 읊다.

전부[이조(吏曹)의 별칭]에 있다 올 봄에 또 현재(賢才)에 양보하고

상쾌해라 쏜살같이 동쪽 산골로 돌아왔네.

적문(翟門. 벼슬을 그만둔 적공의 문이라는 뜻)을 찾는 손님 지금 누구 있으리요.

도경의 솔과 대는 예전처럼 변함없네.

순채 나물에 옥삼갱(玉糝羹) 입맛이 그만이요

송진 기름 태우면서 책을 보는 흥취라니

홍진(紅塵) 속에 대궐 문 출입 하던 삼년의 일

풍랑 치는 바다 건넌 한바탕 꿈이었소.

아곡에서

산허리에 석양빛도 스러지고

빈 개울에 조각달만 흐릿하게 비치는 때

까마귀 떼 울다가 각자 둥지로 돌아가고

먹이 찾는 호랑이 벌써 울에 턱 괴었네

책을 펴면 별의별 일 적혀 있다만

등불 아래 한 마디는 할 말 없구나.

덜컹거리는 덧문 소리 멎게 하노라.

그가 이곳에 터를 잡고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는데, 남한강 변 여섯 고을이 그의 영향을 받아서 유생(儒生) 행세를 했다고 하며, 그래서 남긴 일화가 여러 개 있다.

어느 한 노인이 만년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이웃에 살고 있던 가난한 유생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자 금동(金童)이라고 지어 주었다.

그러나 금동이가 일찍 죽고 둘째 아들인 은동(銀童)이마저 죽자 세 번째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탁하면서 일찍 죽는 금은(金銀)말고 오래 살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유생은 “선생(先生)”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선생이 된 사람은 굶주려도 죽지 않고 얼어도 죽지 않기 때문에 잘 자랄 것이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1621년 조정으로부터 누차 출사(出仕)의 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였으므로 왕명을 어겼다고 하여 구속되기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大司諫)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義州)에서 구치(拘置)되었으나 탈주하여 돌아왔다.

벼슬은 대사헌 ·형조판서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장유(張維)와 더불어 당대의 이름난 학자이자 고문(古文)의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오랜 권위를 가지고 있는 문장을 본뜬다고 해서 고문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대로의 창의력을 가지고 있어야 좋은 글이다’라고 보았고, ‘한문이 지닌 표현능력을 최대한 살려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높고, 꾸미지 않은 것 같은 데서 우아한 흥취가 살아 있어야 고문다운 고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남공철(南公轍)은 이식의 문장을 두고 “택당의 문장은 고산심곡(高山深谷)의 기운이 맺혀서 종유석(鐘乳石)이 되고,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서 조수(鳥獸)의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다.”고 격찬하였고 중국 근대의 고문가(古文家)로 명망이 높은 엄기도(嚴幾道)는 택당의 문장을 비롯한 <여한구대가>의 문장을 평하여 “귀국의 문장이 심히 기이한 가운이 있어 때로는 우리나라 현대 사람들보다 앞섰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또한 유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여 <권생 상원을 보내는 서(.送權生尙遠序)>에서는 “권생은 명산에 놀기를 좋아하고 방외(方外)의 교유(交遊)가 많으니, 나는 그 도(道)가 허탕하여 의지할 곳이 없어 이단(異端)의 술(術)에 흐를까 두려워한다.”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기축옥사로 인하여 다시 쓸 수 밖에 없었던《선조실록(宣祖實錄)》의 내용이 문제가 있다고 보고 수정의 책임을 맡아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였다. 한말에 김택영(金澤榮)에 의하여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뽑혀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에 6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저서에 《택당집(澤堂集)》 《초학자훈증집(初學字訓增輯)》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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