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신정일 기자)
(사진=신정일 기자)

익산 왕릉원(쌍릉)에 숨은 비밀,

“아마 당신은 이렇게 묻고 싶겠지요.?”

“그 전설이 사실이라고 확신하는가.?”

프랑스의 빼어난 시인 보들레르의 <산문시> ‘창문’이라는 시의 앞 소절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역사유적 중에, 겹겹이 비밀의 베일에 쌓여 있어서 그런지 그 진위가 확실하지 않아서 말도 많고 전설이 많은 곳이 여러 곳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말이 많은 곳 중의 한 곳이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2기의 백제시대 고분인 쌍릉이다.

고려 충숙왕(1327년) 때 도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쌍릉은,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가 발굴하였다. 그러나 보고서를 간행되지 않았다가 2015년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보고서를 간행한 이 쌍릉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 중의 한 곳인 청주 한씨 종친회에서는 자신들의 조상묘로 주장하고 있다.

‘청주 한씨는 은나라의 현인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연유로 ’익산 쌍릉이 준왕의 묘‘라서 청주한씨의 시조 묘라고 하며, 학계에서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금마에서 익산시로 가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문화유산이 익산의 쌍릉이다.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두 개의 봉분 중 규모가 더 큰 것을 대왕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능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오금사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고려사>에는 고조선 무강왕 및 비의 능이라 한다. 속칭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하다. 일설에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인데, 말통은 즉 서동이 변한 것이라 한다,“

백제 30대 임금은 무왕과 그의 아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전해져온 쌍릉은 백제 말기인 7세기의 굴식 돌방무덤이다.

익산 쌍릉을 처음 발굴했던 때가 1917년이었다. 조사 당시 이미 도굴 피해를 입어 출토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는데, 길이가 2.4m, 너비가 0.76m, 높이가 0.7m인 나무널(木棺)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었다. 당시 출토품에는 나무널을 장식하는 데 사용한 연꽃 무늬가 장식된 두 종류의 밑동쇠(座金具)와 산(山)자형 금동 장식이 출토되었고, 소량의 토기편이 발견되었을 뿐이다.

대왕묘는 지름이 30m, 높이는 5m 정도이고, 소왕묘는 지름이 24m, 높이가 3.5m 정도의 원형분인데,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두 개 모두 부여 능산리 고분군 돌방과 같은 형식으로 판석제 굴식 돌방이다.

(사진=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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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라고도 부르는 널방은 장방형으로 되어 있고,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벽을 세웠다.

널방 중앙에는 관대가 있었으며, 그 위에 둥근 뚜껑을 덮은 목관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2017년 대왕묘를 조사할 때 확인한 바로는 동서 약 25m, 남북 약 28m로 남북 방향이 약간 긴 형태라는 것이 밝혀졌다. 대왕묘는 석실이 봉분의 중앙에서 남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있고, 판축 기법을 활용하여 봉토를 성토한 것이 새롭게 밝혀졌는데 백제 고분에서는 처음 확인된 것이다. 길이가 4m, 너비가 1.75m, 높이가 2.25m인 대왕묘의 돌방 규모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동하총(길이 3.26m)보다 크기 때문에 이 묘에 묻힌 주인공의 신분을 추정할 수 있다.

(사진=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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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묘의 남면 중앙에 널길(羨道)이 설치되어 있었고, 널문(羨門)은 너비 1m, 높이 1.5m이고, 길이가 1m 정도였다. 바닥 중앙에는 관대(棺臺)가 놓여 있었다.

소왕묘는 2019년부터 조사가 시작되어 아직 전모를 알 수 없지만 1917년 조사 한 바에 d의하면 돌방의 규모가 길이 3.2m였고,, 너비는 1.3m, 높이는 1.7m로 대왕묘보다 작았다고 한다.

이 쌍릉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무덤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뚜렷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2017년부터 2019년까지의 연차적인 학술발굴조사를 시작했는데, 2017년에 대왕묘의 석실 끝부분에서 100여 편의 인골 조각이 담긴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그 인골을 분석한 결과 620~659년 무렵 사망한 50~70대 남성 노인의 뼈로 추정되면서 무왕의 능이 맞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학계에서는 대왕릉에는 무왕이, 소왕릉에는 선화공주가 묻혀 있고, 대왕릉에서 발견된 인골의 주인공은 무왕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다른 학설이 제기 되었는데, 쌍릉 가운데 대왕릉보다 소왕릉이 먼저 축조됐다는 학계 주장이 나왔다.

(사진=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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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익산박물관에서 열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영기와 새로운 백제사 인식’ 학술대회에서 이문형 원광대교수는 "소왕릉은 배수시설과 둘레석 설치까지 부여 왕릉원의 왕릉을 충실하게 답습하고 있다"며 "배수시설은 백제가 한성과 공주에 도읍을 뒀을 때 만든 횡혈식 석실분(橫穴式石室墳·굴식돌방무덤)에서 전통적으로 확인된다" 며 소왕릉이 대왕릉보다 먼저 조성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 뒤 2021년에 익산 쌍릉에서 제사시설로 추정되는 대형건물터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경주나, 부여, 그리고 가야시대의 유적이 많은 고령이나 창녕, 그리고 나주 반남고분군에 답사를 가면 둥글게 솟아 있는 능원들이 있어서 부럽다고 여긴 적이 있는데, 익산시에서 무왕릉으로 밝혀진 익산 쌍릉공원을‘익산 왕릉원’으로 명칭을 변경해 백제시대 왕도로 위상을 정립하기로 했다니,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열려진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는 자는,

닫혀진 창문을 보는 자가 발견하는 풍부한 사실들을 발견할 수 없다.”

다시 보들레르의 <창문>이라는 시의 두 소절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전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다시 전설이 되면서 역사가 되고, 삶이 되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고 볼 때 익산의 쌍릉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보물창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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