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잠든 날의 새벽은 너무 일찍 온다. 두런두런 대며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취객들의 목소리 속에서도 새벽은 오고 아스라이 들리는 교회의 종 소리 속에서도 새벽은 온다. 무거운 눈꺼풀을 부비며 불을 켠다. 새벽 4시 20분 머리맡엔 지난밤에 우리들이 나누었던 이야기들이 묻어있는 몇 병의 술병들과 마른 오징어와 과자 봉다리 몇 개. 그래 어젯밤의 술자리에서 통영의 토박이 정영주선생은 "통영의 새벽은 어물전에서부터 온다" 고 말하지 않았던가.

일행들을 깨워 우리들이 묶었던 신라장을 빠져나온 시간이 6시 정정대 선생의 안내로 어시장으로 들어선다. 겨우 사람들이 다닐 만큼의 길만 열어놓고 양옆에 펼쳐진 고무다라이 통에 문어와 전어, 숭어들이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아침 일찍 시장바구니를 가지고 어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금세 통영어시장은 부산해진다. 그 틈바구니에서 아내는 윤이 번쩍번쩍 나는 햇밤 한 봉지를 산다.

남해의 항구, 통영의 어시장에서 어물을 사지 않고 밤을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어물전에 흠뻑 빠져 있는 일행들을 남겨둔 채 연안여객선 터미널 쪽으로 나가본다. 아침이 빨갛게 밝아오는데 해가 떠오를 듯  싶은 동쪽 하늘만 유독 구름이 자욱하다. 아무래도 오늘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보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출항을 기다리는 배 너머로 어찌 보면 누운 부처님처럼 길게 누워있는 미륵산은 떠오르는 아침 해보다도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정정대 선생의 안내로 통영의 대표적 해장국이라고 할 수 있는 쫄 복집에 들러 시원한 쫄복 한 그릇을 게 눈 감추듯 비우고 미륵도로 가는 차편에 몸을 실었다.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려수도(신정일 기자)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한려수도(신정일 기자)

지금은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놓여서 사람들이 해저터널을 잘 찾지 않지만 해저터널은 한동안 통영사람들의 명소였다. 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의 좁은 물길이었던 이곳에 한산대첩에 쫓기던 왜선들이 도망쳐 왔지만 배가 갈 수 없자 땅을 파헤치고 물길을 뚫어 도망쳤다 해서 '판데목' 또는 '판도목' 으로 불리우고, 수많은 왜군이 죽었으므로 '송장목' 이라고 불렸던 이곳에 1927년에서 1932년까지 5년에 걸쳐 해저터널을 만들었다. 길이가 461m에 너비가 5m 높이 3.5m인 이굴의 이름은 도요토이의 관명을 따서 태합 굴이라 지어졌다. 이 해저터널을 지나며 미륵도의 해안 일주도로와 만난다. 자동차 드라이브 코스로서 나라 안의 명소로 알려져 있는 미륵도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달아공원에서 잠시 쉬며 푸른 바다와 푸른 산 그리고 푸른 하늘과 푸른 섬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깨닫는다.

통영 벅수(신정일 기자)
통영 벅수(신정일 기자)

 

손동명씨는 이곳 한려수도일대에서 군복무(해군)를 수행하고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했었는데, 어기고 왔다 면서도 돌아갈 수 없는 그날에 대한 그리운 눈길을 보내고 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 다 그랬었다. 논산 훈련소에 입소한 사람들은 논산 땅을 보고는 오줌도 안 싸겠다고 다짐을 했고 철원에 근무한 사람은 철원 땅을 다시는 찾지 않 겠다고도 했다. 

다시 길을 재촉하여 영운리 바닷가를 지나가다가 정정대 선생이 우뚝 솟은 바위섬을 가리키며 우리에게 묻는다. "저 바위가 어떤 모양인지요?"

우리들이 잘 모르겠다고 하자 정정대선생은 저 바위가 복 바위라면서 "저 바위가 원래 남근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였던지 마을 남자들이 바람을 자주 피우게 되자 저 바위 한쪽을 폭파했다지요. 그러자 이 마을 여자들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는데..."

통영 용화사(신정일 기자)
통영 용화사(신정일 기자)

 

이 나라 이 땅 어느 곳이건 전설 없고 사연 없는 곳이 또 어디가 있겠는가. 그곳에서도 한참을 달리자 통영 시내가 나타나고 용화사 가는 푯말이 보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용화사로 향한다. 쉬는 날이라선지 가족단위 산행객이 간간이 눈에 띄고 용화사에 접어들자 적묵당 뒤편에 미륵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란 잔디밭을 가운데 두고 적묵당, 탐진당, 보광전 아래를 한 스님이 이리저리 돌고 있다.

관음전쪽으로 가는 길이 어느 쪽이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아마도 묵언수도 중인지도 모르겠다.

미륵산에는 미륵불이 살고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미륵산 자락에 있는 용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미륵산은 예로부터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의 상주처로 믿어져왔던 곳이다. 이절은 광해군 9년에 성화선사가 통제사 윤천(尹天)의 주선으로 군 막사의 성격을 띈 사찰을 창건하고 정수사(淨水寺)라고 하였다. 5년이 지난 후 폭풍으로 정수사가 파괴되어 1622년에 미륵산 제3봉인 삼장골에 중창하고 천택사라고 하였다가 1628년(인조6년) 다시 화재로 절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바람과 물과 불의 삼재(三災)를 당하자 성화는 미륵산 제1봉에서 7주야를 기도를 올렸다. 그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어 미륵불을 모시도록 계시하였다. 벽담당 행선이 화주가 되어 천택사의 남은 건물을 이전하여 용화사라고 이름 지었는데 지금의 보광전 기둥은 그때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내세울 만한 문화재는 별로 없지만 용화전, 명부전, 석진당, 적묵당, 해월루 등의 건물들이 있고 문화재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석존여래상과 80여년전 함양 영은사에서 옮겨온 고려중기의 작품인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있다. 그리고 적묵당 주봉 쪽으로 올라가면 육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으며, 그 뒤편에 효봉스님의 5층 사리탑이 있다. 종루의 글씨는 범어사 종루의 현판을 모각한 것으로 하성파의 글씨이다.

용화사의 정전인 보광전에 들어가 배례한 후 명부전을 거쳐 미륵도량의 중심전각인 용화전 앞에 서면 통영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보이는 벽발산은 석가세존의 의발(衣鉢)을 장차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때 그에게 전해주라는 유언을 받은 가섭존자가 그 산에 머물면서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용화사에서 관음전에 이르는 길섶에는 축 늘어진 소나무들과 잡목 숲이 어우러져 한가로운 산책로를 연출하고 있지만 그 중간 쯤 한부분이 지난 태풍 때에 난 산사태로 인하여 길도 무너지고 오래 묵은 나무들도 뿌리가 뽑힌 채 쓰러져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형태가 온전치 못하나 오래된 듯 한 지암대사의 부도가 있다. 조금 오르자 며칠간 내린 비로 넘쳐흐르는 개울이 나타나고 20여 미터 쯤 오르면 관음암이다. 광해군 8년에 청안선사가 창건하였다는 관음암의 입구에는 마치 석성의 문루와 같은 누문을 세웠고 '당래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문을 들어서자 가정집 분위기를 풍기는 관음전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절 주위를 대나무 숲이 에워싸고 그 아래 자락에 상사화 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다. 동관전, 산신각 요사채가 들어선 경내에 잔디와 꽃나무들이 곱게 가꾸어져 한가로운 정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길은 도솔암 쪽으로 이어진다. 300미터 쯤 올라갔을까 천지봉 아래에 도솔암이 자리 잡고 있다.

미륵산 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알려져 있는 도솔암은 고려 태조 21년(943년) 도솔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창건에 얽힌 설화가 매우 유명하다. 17세에 출가하여 25세까지 지리산 칠불암에서 수도하였던 도솔스님은 이곳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암굴에 머물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호랑이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그 호랑이가 한 처녀를 업어다 바쳤다. 처녀는 전라도 보성에 사는 배이방의 딸이었는데 혼례 날을 받아 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붙들려 온 것이었다. 도솔스님이 그 처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자 배이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엽전 300이라는 거금을 희사하였고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영주 희방사의 창건설화와 비슷한데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동굴이 있고 창건 이후 초음과 자암등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수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한때는 ‘남방제일선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현존하는 건물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2호인 대웅전과 칠성전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천주(天主)인 미륵보살이 상주하고 있는 도솔천의 내원궁이라고 할 수 있는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과 후불탱이 모셔져 있고 다른 곳에는 별로 찾아볼 수가 없는 칠원성군을 불화로 만든 칠불탱이 좌우로 걸려 있다. 후불탱화와 칠불탱은 정조 22년에 그려졌다고 하는데 화기(畵記)에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에 봉안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절이 들어앉은 지형이 금계포란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연유 탓인지 이절 입구에는 뱀의 드나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입구에 돼지상이 하나 세워져 있다. 절 동편에 큰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의지해 쌓여진 담장에 올라선다. 통영시내와 거제 해협이 그림처럼 눈 아래에 깔려있다.

가야총림의 피난처였던 도솔암

이 도솔암에 한국전쟁 때 가야총림의 대중들이 피난을 오게 된다. 그때 해인사 방장인 효봉대선사와 금오대선사 등 불교계의 거물들이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 구산대선사가 고성 이(李)부자집 사랑채가 헐리는 것을 사서 동국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방을 지었고 1954년에는 미륵산 남쪽 영운리 일대의 적산 산림을 불하받아 미래사를 창건하게 된다. 금강산에서 피난을 왔던 효봉 스님의 스승인 석두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하고 이곳에서 효봉스님의 큰 제자들인 법정(法頂), 일초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 큰 문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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