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악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원사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원기리 모악산에 있는 절로서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열반종의 개산조인 보덕의 제자 일승, 심정, 대원 등이 창건한 사찰이다. 일연스님의 지은 '삼국유사'에 실린대로 연개소문이 밀교를 받아들이자 하룻밤새에 보덕화상이 비래방장을 경복사터로 옮겼고, 열반종(涅槃宗)을 열었다. 열반종 개산조인 보덕(普德)의 제자 일승(一乘)·심정(心正)·대원(大原) 등이 670년(문무왕 10)에 창건한 사찰이다. 보덕 제자들은 열반종 교리를 배운 뒤 스승이 있는 경복사(景福寺)를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고려 문종 20년인 1066년 원명(圓明)이 중창했고, 공민왕 23년인 1374년( 나옹(懶翁)이 중창했다. 그 뒤에도 광해군 4년인 1612년에 진묵(震默)이, 영조 9년인 1733년 천조(千照)가, 고종 23년인 1886년 금곡(錦谷)이 각각 중창을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 전경. 사진 맨 오른쪽에 대웅전이 보인다. (신정일 기자)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 있는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 전경. 사진 맨 오른쪽에 대웅전이 보인다. (신정일 기자)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산신각·승방·객실 등이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이다. 대웅전 안 중앙에 석가여래삼존불이 있고, 불상 뒷면에 후불탱화(後佛幀畫)와 나한탱화(羅漢幀畫)가 있으며, 삼존불상 앞에는 괴목(槐木)으로 만든 목각사자상(木刻獅子像)이 있다.

1976년 전라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된 이 목각사자상은 높이 90㎝, 길이 135㎝이며, 진묵이 축생들을 천상으로 천도하기 위해 이 목각사자상을 만든 뒤 그 위에 북을 올려놓고 쳤다고 하며 대웅전 뒤쪽에 있는 오층석탑과 9기의 부도(浮屠)가 있다.

모악산 자락 대원사는 조선 후기에 증산교를 창시한 증산 강일순의 발자취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는 유서 깊은 절이다. 증산은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황토현 근처 시루봉이라는 작은 산 너머에서 태어났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김제에서 서당 훈장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난리가 났다는 소문을 듣고 전봉준이 사는 마을에 가서 동학 접주 안윤거를 만났다. 안윤거는 “황토현 싸움에서는 승리했지만, 필경 패망을 면치 못할 것”이라던 전봉준의 말을 전했다. 결국 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부터 증산은 깊은 절망에 빠져든다. 절망 속에서 그는 각처를 떠돌아다니며 술객(術客)들을 만난다. 후천개벽사상을 원리에 의해 이론화시켜 정역사상으로 정립한 논산의 김일부도 그때 만났다. 그를 통해 동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사상, 민중을 억압과 질곡 속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사상을 접하게 된다.

1900년에는 모악산의 대원사 칠성각에서 도를 닦았다. 이정립이 편찬한 '대순전경'에 실린 그 당시의 상황을 보자.

전북 완주 모악산 대원사 오층석탑 (신정일 기자)
전북 완주 모악산 대원사 오층석탑 (신정일 기자)

천사, 여러 해 동안 각지에 유력하사 많은 경험을 얻으시고, 신축에 이르러 비로소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권능을 얻지 않고는 뜻을 이루지 못할 줄을 깨달으시고, 드디어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도를 닦으사 칠월 오일 대우 오룡허풍에 천지대도를 깨달으시고 탐음진치사종마(貪淫瞋癡四種魔)를 극복하시니 이 때 그 절 주지 박금곡이 수종 들었더라.

강일순의 나이 서른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다섯 마리 용이 불어내는 심한 폭풍우 한가운데서 천지의 큰 도를 깨달은 그는 이때부터 1909년 8월 9일 서른아홉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 동안 금평못 안쪽에 위치한 구릿골에서 ‘천지공사’를 행한다.《증산교사》에 의하면 천지공사는 ‘증산의 깨달음을 포교하는 것이요, 온갖 질병과 부조리가 만연하고 있는 세상을 송두리째 뜯어 고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이라고 한다. 두 평 남짓한 방에 마련한 약방 광제국(廣濟局) 앞마당에서 증산은 ‘천대받는 민중이 한울님’이라고 설파한다.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끝난 후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었고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던 뿌리 뽑힌 민중들은 증산교로, 보천교로, 원불교로 귀의했다. 모악산 자락에서만 증산교 교파가 50여 개를 헤아릴 정도로 우후죽순 생겨났다.

증산은 죽기 전에 천지굿판을 벌였다. 선천시대는 양의 시대였으나 후천시대는 음의 세계라며, 자신의 법통을 고판례라는 여자에게 넘겼다. 남자도 아닌 여자에게, 그것도 그 시절엔 누가 업어가도 개의치 않을 과부였고 무당이었던 여자에게 법통을 넘긴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 여인(고판례)이 굶으면 온 천하 사람이 굶을 것이며, 이 여인이 먹으면 천하 사람이 다 먹을 것이다. 그리고 이 여인이 눈물을 흘리면 천하 사람이 눈물을 흘릴 것이요, 한숨을 쉬면 천하 사람이 한숨을 쉴 것이다. 이 여인이 기뻐하면 천하 사람이 기뻐할 것이요, 이 여인이 행복하면 천하 사람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여인의 눈이 빛나면 천하 사람의 눈이 빛날 것이다. 이 여인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하면 모든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워할 것이며, 이 여인의 따뜻한 말 한마디는 온 세상을 따뜻하게 할 것이다.

강일순의 말이다. 고판례 예찬은 이 세상 모든 여자를 예찬하는 말이기도 했고, 남녀평등시대의 미래를 열어 보인 예언이기도 하였다. 고판례는 증산의 제자인 차경석의 이종누이였는데, 차경석은 증산 사후에 보천교를 세워 자칭 차천자(車天子)가 된다.

전북 완주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 명부전 (신정일 기자)
전북 완주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 명부전 (신정일 기자)

증산은 “세상의 모든 질병과 고통과 절망을 내가 다 짊어지고 가노라”며 한 달여를 쌀 한 톨 입에 넣지 않고 가끔 소주 한두 모금으로 목을 축이며 온갖 병을 다 앓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전 생애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채 떠난 그의 관에는 ‘생각에서 생각이 나오느니라’라고 쓰여 있었다.

조동일은 '한국문학통사'에서 강일순의 후천개벽과 천지공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강일순은 후천개벽의 천지공사를 한다면서 우선 상극, 억압, 원한을 특징으로 하는 선천시대의 폐단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나라는 충 때문에, 집은 효 때문에, 몸은 열 때문에 망했으니 충, 효, 열의 헛된 구속에 미련을 두지 말고, ‘망하는 세간은 아낌없이 버리고, 새 배포를 꾸미라’고 했다. 그 동안 귀신이나 하늘에까지 쌓인 원한을 두루 풀고, 다가오는 시대인 후천에는 천대받고 억눌린 사람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기를 펴고 살도록 하는 것이 자기가 이루어야 할 최상의 과업이라고 했다.

강일순은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해원(解寃)을 강조했는데, 해원은 개인적인 원한 청산으로 달성되지 않고, 천지운행의 도수부터 고쳐야 철저하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런 해원을 통하여 ‘내세나 피안이 아닌 현세의 삶에서 화해와 조화로 가득 찬 선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학농민혁명의 3대 지도자인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과 더불어 ‘위대한 선각자’로 꼽히는 증산은 암울했던 시대의 조선 민중들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이 남조선 뱃노래를 부르며 이 나라를 찾아올 것’이라며 꿈과 이상을 심어 주었다. 그 꿈은 오늘도 이 땅의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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