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신정일 기자)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신정일 기자)

"두륜산, 관아의 남쪽 30리 녹산면에 있다. 산 아래에 대둔사가 있다. 거기에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곳이 있는데 하늘이 빚어 놓은 듯 넓고 평평하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으며 샘물은 방울방울 솟아오른다. 그 산봉우리들은 겹겹으로 포개져 깎아지른 듯이 서 있다. 그야말로 큰 강가에 웅장한 진(鎭)의 모습을 갖추고 있으므로 예로부터 요새 같은 산성을 쌓을 만한 곳이라는 말들이 전해져 온다"

"여지도서"의 '관애' 조에 실린 두륜산은 다도해의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가 근처에 우뚝 솟은 산이다. 해남군의 삼산면, 현산면, 북평면, 옥천면에 걸쳐 있는 두륜산은 높이가 703미터(m)로 땅끝 기맥의 남단에서 다도해를 굽어다보며 우뚝 솟아난 이 산은 1979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두륜산은 주봉인 간연봉, 두륜봉, 고계봉, 도솔봉, 혈망봉, 향로봉, 연화봉 등이 연봉을 이루는데, 원래 이 산은 대둔사라는 이름에 따라 대둔산이라고 부르다가 대둔사가 대흥산이라고 이름을 바꾸자 대흥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두륜의 뜻은 산 모양이 둥글게 사방으로 둘러서 솟은 '둥근머리산' 또는 날카로운 산정을 이루지 못하고 둥글넓적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데서 연유된 것이다.

또 하나 다른 이름은 한듬산으로도 불리는데 옛 말에 '한(限)'이란 우리가 흔히 한이 없다고 표현하듯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한듬절로도 불리는 이 산자락에 큰 절 대흥사가 있다.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두륜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사찰인 이 절은 '대둔사(大芚寺)'라고도 부르는데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다.

2009년 12월에 사적으로 지정됐던 이 절은 2018년 6월에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해남 대흥사 부도. (신정일 기자)
해남 대흥사 부도. (신정일 기자)

이 절이 창건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가지가 전해져 온다. '대둔사지(大芚寺誌)'에는 426년인 구이신왕 7년에 신라의 정관존자(淨觀尊者)가 창건해 '만일암'이라 했다고 실려 있고 '만일암고'에는 508년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善行比丘)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다른 기록 '죽미기'에는 신라 법흥왕 1년인 514년에 "아도(阿道)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 다른 기록에는 헌강왕 11년인 895년에 도선(道詵)이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500사찰을 짓는 것이 좋겠다"고 상소했는데 대흥사도 그 중의 하나라는 설 등이 있다. 하지만 '대둔사지'의 자료를 모았던 혜장(惠藏)의 글에는 이 모든 기록이 창건자의 활동 시기로 살펴 볼 때 모두 신빙성이 없다고 봤다.

아도화상만 보아도 그가 절을 지은 시기가 그가 활약했던 신라 미추왕 2년인 265년보다 300년 가까이 앞선다는 점과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는 기록이 없을뿐더러 도선국사가 태어난 해가 헌강왕 원년이라는 사실 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의 앞마당에 신암(信菴)·사은(思隱)·성유(性柔) 등 세 승려의 부도(浮屠)가 있었다"고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승려들이 고려 시대의 승려이므로 대흥사가 고려 이전에 창건된 것은 확실하기때문에 혜장이 주장한 신라 말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에는 아직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는데 이 절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서산대사 휴정이 그의 의발(衣鉢)을 전하면서부터였다.

'주인은 꿈을 나그네에게 말하고 나그네도 꿈을 주인에게 말한다. 지금 두 꿈을 말하는 나그네 그 또한 꿈속에 사람이구나'라고 노래한 서산대사의 유품이 남아 있는데 대흥사(大興寺)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해 공훈을 세운 서산대사(西山大師)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을 봉안한 표충사(表忠祠)가 있다.

해남 두륜산 북미륵암. (신정일 기자)
해남 두륜산 북미륵암. (신정일 기자)

그 당시 선과 교, 그리고 좌선(坐禪), 진언, 염불(念佛), 간경 등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불교계에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며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설파했던 서산대사는 선조 37년(1604) 1월 어느 날 묘향산에서 입적을 앞두고 그의 제자였던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자신의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발우를 해남 대둔사에 두라는 유언을 남겼다. 서산대사는 무슨 연유인가 궁금해 하는 제자들에게 "대둔사는 병란을 비롯한 삼재(三災)가 미치지 않을 유일한 땅이며, 만년을 지나도록 일그러지지 않을 곳"이므로 그의 유품을 보관할 만한 곳이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뒤 제자들은 그의 시신은 다비한 후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安心寺)에 부도를 세웠고 영골(靈骨)은 금강산 유점사 북쪽에 있는 바위에 봉안하고 금란가사와 발우는 이곳에 안치했다고 한다. 

선조 40년인 1607년에 해남의 외딴 곳 대흥사에 의발을 전한 서산대사의 배려에 의해서 이 절은 배불(排佛)의 강압 속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하는 선교양종(禪敎兩宗)의 대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됐다.

그 뒤, 현종 6년인 1665년 심수(心粹)가 대웅전을 중창했는데 현종 5년인 1665년 봄에 중건을 시작해 1667년 가을에 완성한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3칸의 다포집이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로 완도 신지도에 유배되어 왔던 원교 이광사(李匡師)가 썼다. 대웅전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만든 목조삼존불과 광무연간에 조성된 후불탱화(後佛幀怜)를 비롯해서 감로탱화·삼장탱화·신중탱화·칠성탱화가 있다. 대웅전 앞에는 침계루(枕溪樓)가 냇가에 연이어 있고 좌우에는 승사인 백설당(白雪堂)·세심당(洗心堂)이 있다. 백설당에는 김정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편액이 있으며 이 건물은 현재 큰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웅보전 동편에는 응진전(應眞殿)이 있으며 안에는 석가여래삼존불을 중심으로 16나한상이 봉안돼 있으며 응진전 앞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해남 대흥사 삼층석탑이 있다.

2013년 보물로 지정된 해남 대흥사 천불전은 순조 11년인 1811년에 화재로 소실된뒤 1813년에 중건한 것으로 천불전 내부에는 1974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흥사 천불상이 봉안돼 있다. 경주 옥돌로 조성된 이 천불상은 완호 등 10인이 6년에 걸쳐 조성했다. 천불이 완성된 뒤 바닷길을 통해 이 대흥사로 옮기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여 일본에 닿게 됐다. 그때 일본인들의 꿈에 이 천불이 나타나서 '우리는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둔사로 가는 중'이라 해 다시 대흥사로 돌아오게 됐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 문살. (신정일 기자)
해남 대흥사 천불전 문살. (신정일 기자)

표충사는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말해 주는 대표적인 건물로 표충사의 건물은 정조 13년인 1789년에 건립됐고 편액은 정조의 친필이며, 정면 3칸의 맞배집이다.

이 표충사에는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해 공훈을 세웠던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四溟)과 처영(處英)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1976년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했다.

표충사를 중심으로 좌우에 표충비각(表忠碑閣)과 조사전(祖師殿), 정면에 삼문(三門), 삼문 밖에는 2층 누각인 의중당(義重堂)과 앞쪽으로 중문인 예제문(禮齊門)과 정문인 호국문(護國門)이 있으며 의중당의 동쪽에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비롯하여 절의 유물(遺物)을 보관하는 서산대사유물관이 있다. 

한편 대흥사의 일지암은 조선후기에 최초로 차 연구 저서인 동다송(東茶頌)을 지은 초의(草衣)선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립한 초의선사는 '모든 법(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평상심이 곧 도(道)'라고 여겼다. 초의선사는 선(仙)이나 교(敎)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는 것은 똑같이 이롭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오로지 선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던 백파(白波)대선사(1767-1852년)와 논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밝은 달 촛불 삼고 또한 벗을 삼아 흰 구름 자리하고 또한 병풍도 하여 죽뢰 인양, 송도인양 시원도 하고 몸도 마음도 맑고 또 맑아, 흰 구름 밝은 달 손님으로 맞으면 도인의 앉은 자리가 이보다 나을손가'하고 노래한 초의선사는 이곳 일지암에서 강진으로 유배돼 왔던 스물네 살 연상의 다산 정약용을 스승처럼 모시며 교류를 나누기도 했고 제주도에 유배됐던 추사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에 다녀오기도 했다.

대둔사를 오고 가면서 가르침을 받았던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인 소치(小痴) 허련(許鍊)(1809~1892)은 일지암에 머물던 초의선사를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그가 머무는 곳은 두륜산 꼭대기 아래이다. 소나무 숲이 깊고 대나무 무성한 곳에 몇 칸의 초실을 얽었다. 늘어진 버들이 처마에 닿아 있고 풀꽃이 섬돌에 가득 차서 그늘이 뒤엉켜 있었다. 뜰 가운데는 아래위로 못을 파고 처마 아래에는 크고 작은 물통을 놓아두었는데, 대쪽을 연결해서 멀리서 구름비친 샘물을 끌어온다. 눈에 걸리는 꽃가지를 잘라버리니 멋있는 산봉우리가 석양 하늘에 더 잘 보이네' 이러한 시구가 매우 많은데 시가 맑고 고상하며 담박하고 우아하니 속된 기운이 없다. 눈 내리는 새벽이나 달이 뜬 밤마다 시를 읊으며 흥을 견디곤 했다. 향기가 일어나고 차가 한창 끓으면 흥이 내키는 대로 거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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