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산은 예로부터 계람산, 옹산, 서악, 중악, 계악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고, 통일신라 이후에는 신라 5악 중의 서악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이 산에 중악단을 설치 봄가을에 산신제를 올렸다. 또한 계룡산이라는 이름을 계곡의 물이 쪽빛처럼 푸른데서 연유한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계룡산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4대 명산, 4대 진산으로 일컬어 왔다. 

계곡의 물은 쪽빛처럼 푸르고 천황봉에서 삼불봉까지의 산세가 닭 벼슬을 쓴 용의 모양이어서 계룡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 산에도 팔경이 있다.  “연천봉의 낙조와 관음봉의 한가로운 구름, 천황봉의 일출, 장군봉 쪽의 겹겹이 포개진 능선 그리고 세 부처님을 닮았다는 삼불봉의 설화, 오뉘탑의 달, 동학사 계곡의 신록, 갑사계곡의 단풍이 어우러진 계룡산은 풍수지리상으로도 대단한 명산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찍이 태조 이성계가 이 산기슭에 도읍을 청하고자 하였고 그 뒤에는 정감록이라는 금서비기가 나왔다. 정여립을 비롯한 조선의 혁명가들은 정감록(鄭鑑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그것은 감결에서 ”이심이... 산천의 뭉친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백년의 땅이다“라고 하여 ”한양에 도읍한 이조 뒤에는 계룡사에 도읍한 정씨 왕조 8백년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정공은 “계룡개국에 변(卞)씨 재상에 배씨 장수가 개국원훈이고 방씨와 우씨가 수족과 같으리라”하여 개국까지의 상황을 내다본 것이라고 한다. 계룡산 신도안에는 그러한 정감록 사상과 변혁사상에 힘입어 수많은 종교사상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1970년대의 정화작업이 있기 전까지 종교단체의 수가 1백여 개에 이르렀다.

삼불고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고향집을 찾아가는 고갯길 같은 길은 400여 미터쯤 내려갔을까. 금잔디고개에 닿는다.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는 이곳은 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나무 숲 사이로 멀리 푸르른 벌판이 나타난다. 배낭을 벗고 홍현희 씨가 가지고온 참외며 자두를 꺼내먹는다. 산행 중에 잠시 쉬면서 알맞게 먹고 나누는 몇 마디 말,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산행에 한 부분인지...

다시 길을 나서서 우거진 나무 숲길을 걸어서 신흥암에 닿았다. 신흥암은 중창불사가 한창이었으며 그 뒤에 천진보탑이 서 있다. 석가모니가 입적한 400년 만에 중인도의 아육왕이 구시나국에 있는 사리모탑에서 부처의 사리를 발견하여 서방 세계에 분포할 때 비사문천왕을 보내어 계룡산에 있는 이 천연적인 석탑 속에 봉안하여 두었다고 한다. 이 석탑을 백제 구이신왕 대 발견하여 천진보탑이라고 하였고 그 뒤편에 솟아있는 수정같이 고운 수정봉은 갑사구곡의 하나이다.

개울물 소리를 벗 삼아 미륵골을 20여 분 내려왔을까 용문폭포가 나타났다. 연천봉 북서쪽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이곳으로 흘러 폭포를 이루었는데 높이가 10여 미터쯤 되는 용문폭포는 장마철이라서 그 물줄기가 장대하다. 폭포 옆에 있는 큰 바위굴이 있고 그 속에서 떨어지는 감로수가 등산객의 갈증을 풀어주기도 한다. 그 폭포 주변에는 대학생인 듯싶은 젊은이들이 몇 십 명쯤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다시 15분쯤 걸어가자 목탁소리 들리고 갑사에 닿는다.

 

갑사 대웅전 (신정일 기자)
갑사 대웅전 (신정일 기자)

갑사(甲寺)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위치한 절로서 화엄종의 10대 사찰중하나이다. 420년(구이신왕1년) 고구려의 승려 아도(阿道)화상이 창건하였고 그 뒤에 신라의 의상대사가 고쳐지었다는 이 절은 조선 선조 때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렸고 같은 해에 인조가 다시 세웠다.

갑사에는 대웅전, 강단, 대적 전, 천불전 같은 절 건물들과 암자들이 열 채쯤 들어서 있는데 원래의 갑사는 지금의 대웅전이 서있는 자리가 아니라 개울 건너 대적전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이 절에는 나라 안에 칠장사와 청주 용두사지에만 있는 철당간지주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구리로 만든 종과「원인석보」의 판목이 있고 약사여래 돌 입상, 부도탑 등의 지방문화재들이 있다.

갑사는 또한 봄 마곡 추 갑사로 불릴 만큼 가을 경치가 뛰어나게 아름답지만 굳이 가을이 아니어도 갑사는 그윽하게 우거진 나무숲들로 하여 찾는 이들의 감탄사를 자아내는 절이다. 갑사에 도착했을 때 1시가 넘어 있었다.

 

갑사에는 철 당간지주가 있다,

열 두 시쯤이면 만나기로 했던 총무스님에게 공양을 부탁할 수도 있지만 너무 늦었다. 어느새 구름 걷히고 햇살은 온 천지에 내려 쪼이고 있다. 계단을 올라가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이 조선 후기에 지어진 갑사 강당이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95호인 갑사 강당은 앞면 3칸에 옆면 3칸의 다포식 안판 2출목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강당의 정면에 대웅전이 있다. 역시 유형문화재 105호로 지정된 이 건물은 1.8미터의 화강암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다.

앞면 5칸에 옆면 3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의 다포집이다. 이 절에는 조선 1584년 선조 때 국왕의 성수를 축원하는 기복도량인 갑사에 다른 목적으로 만든 동종이 있다. 높이 131미터에 입 지름이 91미터인 이 종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종은 신라종과 고려 종을 계승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반의 동종의 양식을 볼 수 있는 대표적 작품이다.

갑사 부도 (신정일 기자)
갑사 부도 (신정일 기자)

동종을 보고 다리를 건너면 아름다운 갑사 대적전이 있고 그 앞에 보물 제257호인 갑사 부도를 만난다. 부도의 모습은 일반적인 팔각원당형으로 기단부는 특이한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8각의 높직한 지대석 위에 3층으로 구분되는 지대석이 놓였는데 기단의 사자조각은 매우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 위로는 꿈틀거리는 구름무늬 조각 위에 천인들이 악기를 타고 있다. 이 부도는 고려시대의 부도들 중에서도 우수작으로 손꼽을 만하며 조각 내용들이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갑사 당간지주 (신정일 기자)
갑사 당간지주 (신정일 기자)

부도에서 대나무 숲 우거진 길을 내려오면 갑사 당간지주와 만난다. 석조 지주와 더불어 보물 제256호로 지정된 갑사 당간지주는 원래 28개의 철통이 이어져 있었는데 조선조 말 고종 30년(1893년) 벼락을 맞아 4개가 부러져 24개만 남아있다.

이 철당간지주는 그 조각 수법으로 보아서 통일신라 중기였던 문무왕 20년(680년)에 건립되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기록은 없다. 개울을 건너자 민박집에선 손님들이 늦은 점심을 먹고 있고 우리들 역시 밥이 한울이고 한울이 밥이라는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수정식당으로 발길을 옮겨 동동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며 바라본 계룡산이 마치 ‘에밀리 디킨슨’의 시처럼 커가는 듯이 보였다.

 

산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산들은 눈치 채지 못하게 자란다.

그 자주빛 모습은

시도試圖도, 피로도 없이,

도움도, 또한 박수갈채도 없이 일어선다.

 

그 영원한 얼굴 속에서

태양太陽은 크나큰 기쁨으로

바라본다. 오래 끝까지, 하여 금빛에 물들 때까지

밤의 친교親交를 위해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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