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사의 사월 초파일 풍경 (신정일 기자)
금산사의 사월 초파일 풍경 (신정일 기자)

‘택리지’에 실린 모악산에 대한 기록을 보자.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금산사(金山寺)가 있다. 원래 절터는 용추(龍湫)로서 깊이를 측량할 수 없었다. 신라 때 한 조사(祖師)가 수 만석의 소금으로 메우니 용이 옮겨 갔다. 그 자리를 닦아서 절을 세웠으며, 대웅전(大雄殿) 네 모퉁이 뜰 밑에는 가느다란 간수가 주위를 돌아 나온다. 지금도 누각이 높고 빛나며, 골짜기가 깊숙하다. 또한 호남에서 이름난 큰 절이고, 전주부(全州府)와 가깝다. ’고려사‘에 따르면 견신검(甄神劍)이 아비 훤(萱)을 금산사에 가뒀다는 곳이, 곧 이 절이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호남평야의 어느 지점에서나 보이는 산이 있다. 가까운 듯 혹은 먼 듯 넉넉한 품새로 호남평야의 젖줄인 만경강과 동진강을 나누는 산, 모악산의 산줄기는 서해에 닿을 것처럼 뻗어 내리다가 산자락 아래 드넓은 호남평야를 펼쳐 놓았고 북쪽으로는 천삼백 년의 고도 전주라는 도시를 풀어 놓았다. 모악산 올라서서 바라보면 서북쪽으로 멀리 동양 최대의 절터를 품에 안은 미륵산(彌勒山)이 보이고 여산의 천호산 진묵(震黙)스님 자취가 서린 서방산이 눈앞에 다가오고 서쪽을 바라보면 변산을 지나 바다에 이른다. 바다가 끝나는 지점에서 평야가 시작되고 평야가 마무리되는 산자락에서 산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모악산은 평야와 산지의 경계에 있다. 기름진 호남평야에 목을 걸고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본 산, 모악산은 우리나라 역사 속에 자리한 명산(名山), 영산(靈山) 속에 어떠한 산으로 자리 잡은 산인가.

이중환은 이 모악산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모악산(母岳山) 남쪽에 있는 금산사는 본래 그 절터가 용추로서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었다. 신라 때 한 조사(祖師)가 여러 만석의 소금으로 메워서 용을 쫓아내고 그 자리에다 터를 닦은 뒤 대전(大殿)을 세웠다고 한다. 대전 네 모퉁이 뜰아래에는 가느다란 간수(澗水)가 주위를 둘려 있다. 지금도 누각이 높고 빛나고, 골짜기 마을이 깊숙하다. 또한 호남에서 이름난 큰 절로 전주부 관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려사〉에서 견신검(甄神劍)이 그의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었다는 곳이, 바로 이 절이다.”

금산사 오층석탑 (신정일 기자)
금산사 오층석탑 (신정일 기자)

백제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것은 적과의 싸움이 아니라 아들과의 내분이었다. 견훤은 첫부인에게서 난 신검(神劍)이나 양검(良劍)보다 후백제를 세운 뒤 얻은 아내{부인}에게서 난 아들일 뿐만 아니라 키도 크고 지혜로웠던 넷째아들 금강(金剛)을 더욱 신뢰하였고 그래서 금강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그것을 알아챈 신검은 이찬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휘하의 사람을 강주, 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미게 하였다. 935년 3월 견훤은 아들에 의해 김제 금산사에 유폐되었고 금강은 곧바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 때의 상황이『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실려있다. “처음에 진훤이 잠자리에 누워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멀리 대궐 뜰로부터 고함소리가 들렸으므로, ‘이것이 무슨 소리냐!’고 묻자 신검이 그 아버지에게 고하기를 ‘왕이 연로하셔서 군무(軍務)와 국정(國政)에 혼미하므로 맏아들 신검이 부왕(父王) 자리를 대신하게 됐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축하하는 소리입니다’고 했다. 얼마 안 있어 그 아버지를 금산불우(金山佛宇)로 옮기고 파달(巴達) 등 장사 30명으로 지키게 했다”하고 금산사에 석 달 동안 유폐돼 있던 견훤은 감시 병사 30여명에게 술을 빚어서 먹인 후 막내 아들 능애, 딸 애복, 애첩 고비{금강의 어머니}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왕건에게 항복하고 자기 아들들을 쳐줄 것을 청했다. 왕건은 유금필을 보내어 그를 맞이한 후 백관의 벼슬보다 높은 상부(徜父)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왕건은 그뒤 견훤의 뒤를 따라 망명해 온 견훤의 사위 박영규의 지원을 받는다. 고려에 귀부한 견훤의 뒤를 이어 그해 11월 신라의 경순왕은 그 행렬이 무려 30리에 달하는 많은 수레에 금은보화를 싣고 백관을 거느린 뒤 경주를 출발 열흘만에 개경에 도착한 후 고려에 항복하고 만다. 왕건은 경순왕을 정승으로 임명한 뒤 왕태자보다 높이 대우하였고 그의 딸 낙랑공주와 혼인을 시킨 후 100석의 녹봉과 함께 경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 이듬해 고려군과 후백제군은 지금의 경북 선산인 일선군(一善郡) 일리천(一利川) 전투에서 맞붙게 됐다. 그러나 10만의 고려군과 맞붙게 된 후백제 군은 좌장군 효봉(孝奉)과 덕술(德述)이 항복하면서 사기가 떨어졌고 결국 3200여 명의 군사가 사로잡히고 5700여 명의 군사가 전사하자 후퇴를 거듭하여 지금의 황산군에서 신검, 양검은 문무백관을 이끌고 항복하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김동인은 '견훤'이라는 중편 소설에서 그 당시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날 밤 견훤왕은 밤새도록 소리없이 울었다. 이미 정한 운명이었지만 눈 앞에 이르니 가슴이 저리었다. 더욱이 자기 평생 공을 다 들여서 쌓은 탑이 지금 무너지는데 자기가 그것을 붙드는 데 일호(一毫)의 힘도 가할 수 없고, 도리어 무너뜨리는 편에 붙어서 방관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 더욱이 애달팠다. 베개에서 물을 차낼 수가 있도록 수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누가 견훤의 그 비통한 심사를 알 수가 있으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마흔 몇 해에 걸쳐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궁예와 왕건이 이끄는 후고구려와 맞붙어 싸웠던 그의 큰 뜻은 사라지고 말았다.

견훤은 그후 『삼국사기』에 기록된 대로 “수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서” 지금의 논산시 연산면에 있던 절 황산사에서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을 때 “하늘이 나를 보내면서, 어찌하여 왕건이 뒤따르게 하였던고 [……] 한 땅에 두 마리 용은 살 수 없느니라”라고 길게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김제와 완주 그리고 전주의 경계를 이루며 드넓은 호남평야를 감싸 안고 있는 모악산은 어머니의 품처럼 넓고 포근하며 따뜻하다. 예로부터 엄뫼, 큰뫼로 불려 온 모악산은 이 산의 정상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쉰길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 같아서 모악산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금산사 (신정일 기자)
금산사 (신정일 기자)

계룡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민중 신앙의 텃밭으로 정기 어린 산으로 모악산은 어깨를 겨루었으며 모악산 금산사의 봄 경치와 변산반도의 여름 경치, 내장산의 가을 단풍과 장성 백양사의 겨울 설경은 호남의 4대 절경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풍수지리상의 모악산은 전 지구적 후천개벽의 모산 즉 어머니의 산이고 순창의 회문산은 양산 즉 아버지의 산이라고 하였으며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에서 비롯된 여암 신경준의 산줄기 개념으로 볼 때 모악산은 호남정맥과 떨어져 있는 평지돌출의 산이며,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분지로가 만들어 오늘날까지 평지돌출의 산이며, 일본인 지리학자 고토분지로가 만들어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는 산맥으로 볼 때는 노령산맥에 위치한 산이다. 그러나 모악산이 우리나라 곳곳의 영산과 명산에 견주어 빼어난 것은 산의 수려함과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모악산 자락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금산사가 세워졌고 그 뒤 백제가 망한 뒤 복신, 도침과 의자왕의 아들 풍왕이 중심이 된 백제 부흥운동의 한 거점이 되었다.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 진표율사가 절을 중창,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을 만들면서 번성했다. 백제 멸망으로 뿌리 뽑힌 백제 유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략적인 포석이었다고도 전해지기도 하는 금산사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후백제의 견훤(진훤으로도 불림)에 의해서였다. 스스로 환생한 미륵임을 자처하며 후백제의 왕 견훤이 자신의 복을 비는 사찰로 삼고 중수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아들과의 내분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훗날 ‘가련토다 완산애기 애비 잃고 눈물짓네.’라는 참요만 남기고 견훤이 세웠던 후백제는 사라지고, 후백제의 견훤과 마지막까지 사투(死鬪)를 벌여 승리한 태조 왕건은 호남 차별을 명문화한 훈요십조를 남겼고, 8조에서 “차현 이남과 공주강 이남의 사람은 아무리 미관말직이라도 등용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 말 이후 고려 때 내내 호남지역 사람들은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한 후 그러한 폐단이 사라졌으나 선조 때 전주사람 정여립을 중심으로 조선 선비 1천 여 명이 희생당한 기축옥사(己丑獄死) 이후 호남은 반역의 고장이라 낙인찍혀서 등용에 제한을 당하였다.

금산사 자락에서 조선 중기의 혁명가 정여립이 대동계를 조직했다가 기축옥사라는 큰 사건의 주모자로 의문사 한 뒤 1천 여명의 조선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원평출신의 동학접주 김덕명이 동학농민운동의 주모자가 되었고, 뒤를 이어 증산 강일순이 화엄적 후천개벽사상을 펼쳤던 곳이 금산사 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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