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샅길을 돌아 고즈넉한 풍경과 마주하다.

청운동 서촌의 고샅길 답사는 말 그대로 고샅길을 어슬렁거리는 수준이다. 서울에도 이렇게 아기자기한 골목들이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하다. 좁다란 골목을 벗어나자 통의동 백송이 있었던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로 커서 천연기념물 제 4호였다는 백송은 태풍으로 부러져 뿌리만 남아 있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자그마한 미술관들 사이 담장에 앙증맞게 그려진 꽃나무가 소담스럽다. 맑은 향기가 있을 듯싶어 코를 들이대지만 향기는 없다. 예로부터 청운동 일대를 통틀어 '자핫골' 이라 불렀다. 골이 깊고 수석이 맑아 선경에 비하기도 하였으며 개성의 자하동과 비슷하다는 연유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자명으로는 '자하동' 이라 부른다.

골목을 벗어나자 종로구 궁정동 1번지 '김상헌의 엣 집 터' 라고 쓰인 표지석이 보인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며 결사항쟁을 끝끝내 주장하다가 청나라로 끌려가 청의 수도 심양의 북관에 갇혔던 사람이다.

 골목길을 조금 오르자 청운초등학교가 보이고 길가에 겸재의 그림이 여러 점 새겨져 있다. 이 부근에서 조선시대의 빼어난 화가 중의 한 사람인 겸재 정선이 태어났다. 조선후기의 화가인 정선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지만 마흔 이전의 경력을 확실하게 입증할 만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약관의 나이에 김창집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다고도 하는데, 양반으로서 중인들이 일하는 도화서 화원이 되었을 리 없고, 41세 때인 1716년(숙종 42년) 종 6품의 관상감 천문학겸교수로 첫 관직에 올랐다는 것이 통설이다. 처음에는 중국 남화에서 출발하였으나 서른을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의 진경화로 전환하였다.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던 그는 심사정, 조영석과 함께 삼재로 불리었다. 그림은 잘 그렸지만 문재가 없어 서명과 한두 개의 낙관만이 화폭의 구석에 있을 뿐이다.

이발과 성수침이 남긴 희미한 흔적

청운초등학교 옆으로 해서 유진투자증권 연수원 쪽으로 걸어 올라간다. 제법 가파르다. 지금은 길과 건물들이 들어선 이곳이 겸재의 그림 속에 남아있는 청풍계이다. 아쉽게도 옛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오직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옛 정취를 들려주고 있다. 이곳 청풍계 부근에 '청송당' 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던 사람이 기축옥사 당시 정여립과 함께 최대의 피해를 입은 동인의 영수 이발, 그리고 성수침이었다.

성수침은 조광조에게 고부를 하였으나 조광주가 기묘사화로 화를 입자 벼슬을 단념하고 이곳에 몇 칸짜리 초가집을 짓고서 두문불출하며 공부에만 힘썼던 사람이다. '인물고' 에 의하면 "성수침은 몸집이 크고 번듯한데다가 몸가짐이 남달라서 매우 빼어났으며, 천성이 효성스럽고 마음까지 후덕하여 남을 대하는 것이 무척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기쁜 일이거나 노여운 일을 당해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시대에 사대부들 사이에 은거하고 있지만 덕망이 높은 학자를 손꼽을 때에는 항상 그의 이름이 올랐다.

이발은 송강 정철과의 악연 때문에 기축옥사 당시 멸문지화를 입었던 인물로, 지금도 그가 남긴 시 한편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서울에서 근신하러 돌아가는 도중에 쓴 아름다운 시 속의 어머니는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가 그리워했던 선조는 도저히 더할 수 없는 악연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으니 그의 운명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발을 생각하며 오르는 유진투자증권 연수원 뒤 산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걸을 만하다.

남녘 길 아득한데 새 날아가고

서울은 저기 저 서쪽 구름 가에 있네

아침에 간밤 꿈을 기억해보니

모두가 어머니와 임금의 생각이라.

인조반정을 승리로 이끈 유서 깊은 곳

조금 올라가니 포장도로와 마나는 그 등성이에 청운공원이 있다. 이 근처에서 학창시절 윤동주 시인이 잠시 살았다고 한다. 공원에는 '서시' 가 새겨진 시비가 있고, 그 너머로 보이는 청와대 일대가 한 폭의 그림이다.

창의문(신정일 기자)
창의문(신정일 기자)

잠시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내려서자 고갯마루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문이 나타난다. 창의문이다. 1396년(태조 5년)에 서울 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 한 뒤 창의문이라는 문명을 지었다. 이 문은 축한산,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다.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도성의 북쪽 교외 세검정과 북한산으로 통하는 관문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비(신정일 기자)
윤동주 시비(신정일 기자)

창의문은 훗날 1413년(태종 13년)에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이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길을 내면 지맥이 손상된다고 주장하여 1416년(태종 16년)에 닫았다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열었다. 1623년 인조반정 당시에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도끼로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년)에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김유(金庾), 이귀, 최명길을 비롯한 반정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해로부터 120여 년이 지난 영조 19년(1734년)에 새검정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던 영조 임금은 이곳 자하문에서 반정의거를 회고하며 현판을 꾸며 달게 하였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만든 창의문은 사소문 가운데 원래의 모습이 유일하게 보존된 문이다.

옛 정취가 사라진 부암동을 거닐다.

창의문 문루에 올라가 성 안을 바라다 보고 창의문을 내려서자 부암동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자두와 복숭아, 능금이라고 부르던 과일들을 재배하는 과수원들이 연달아 있던 한적한 곳이었다. 부암동은 원래 한성부 북부 상평방의 일부로 부암이라는 이름은 부침바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암동 134번지에 있는 이 바위에다 다른 돌을 붙이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며, 바위에 돌을 문질러 붙이므로 부침바위 또는 한자명으로 부암이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되었다.

백사실(신정일 기자)
백사실(신정일 기자)

고샅길을 내려가 다시 아기자기한 골목길을 올라가자 김환기미술관이 보이고, 골목길을 올라가 다시 내려가자 거짓말처럼 산길이 아타난다. 나무숲 우거진 그 길목에 '백석동천' 이라는 글씨 넉자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 그 아래가 바로 문화재청에서 국가 명승으로 지정한 백사실 계곡이라는 백석동이다.

부암동 87번지인 백사실은 바위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므로 백석실 또는 배석동, 또는 백사실이라고 불렀다. 예로부터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좋은 이곳을 사람들은 백사 이항복이 공부하던 곳이라고도 하고, 또는 흰모래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나뭇잎이 사각사각 발에 밟히는 비단결 같은 흙길이 이어진다. 산길을 따라 능선길로 가다가 아랫길로 접어들자 절이 한 채 보인다. 절 계단에 앉아 새참을 먹고 절문을 나서자 한줄기 물줄기가 세차게 흐른다. 다시 백석실을 지나 고갯마루를 넘어 도착한 부암동, 이곳에는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종이를 만들던 한지공장이 있었다. 조선 태종 때부터 고종 19년까지 순지와 환지를만들던 조지서가 있었고, 1960년대까지만 해도 종이를 만들던 사람들이 그 전통을 이어왔는데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부암동 269번지에 있었던 메주가마 터 역시 옛 정취가 사라진 지 오래다. 나라에서 이곳에 사는 백성들의 생활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서울 관청에서 쓰는 메주를 쑤는 권리를 주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빽빽한 집터만 남아있다.

자하문 터널 지나 새검정과 석파정에 닿다.

자하문 터널을 지난 차들이 동서로 오고가는 근처에는 새검정과 석파정이 있다. 관서팔경 중의 하나인 세검정은 인조반정을 성사시킨 사람들이 이곳을 흐르는 맑은 시냇가에서 칼을 씻고 잔치를 베풀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문일평이 쓴 '조선사화' 에는 그와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있다.

"사실에 있어서는 인조반정과 하등의 관계가 없고, 숙종 때 삼청동에 설치했던 총융청을 북한산성의 수비를 위하여 영조 때 이곳으로 옮기면서 경치 좋은 데를 택하여 수간정사를 새로 세우고 세검정이라 이름 지으니 때는 정조 24년이었다."

이곳에서 칼을 씻은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사초를 씻었던 곳이다. 사관이 임금의 말이나 나라 일을 적어 실록의 기본자료로 삼은 원고의 먹물을 씻어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종이가 귀해 한 번 썼던 한지를 재생용지로 만들 때 다시 물로 씻어서 순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부암동 20번지에 있는 서가정은 원래 이 부근의 세 갈래의 내가 합해서 흐르므로 바위에 삼계동이라는 글자를 새겨 '삼계동정자' 라 불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살게 되면서 그 아호를 따서 '석파정' 이라 하였다.

골목길을 한참 올라서자 세종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 용이 살았던 비해당 터가 보인다. 비해당은 그의 당호였다. 안평대군은 도원에서 기쁘게 놀았던 꿈을 꾸고서 정자를 지었는데, 바로 무계정사다.

하지만 꿈속인 듯 아름다웠을 비해당 터에는 집 한 채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폐허처럼 변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안평대군이 그린 '몽유도원도' 는 일본에서 이방인들의 가슴을 울리는데, 정작 경복궁에서 멀지 않은 부암동에 있는 그의 집터는 아무도 돌보는 이가 없으니 이를 어찌할까. 가슴 한쪽이 몹시 아리다.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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