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세기 경 히말라야의 남쪽 기슭에 카필라 족이 살고 있었고 그 나라 정반왕에게 40이 넘도록 아들이 없었다.

어느 날 마야 왕비는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꾼 후 태기가 있게 되고 친정으로 해산하러 가던 길에 룸비니 동산 무우수 아래에서 태자를 낳았다.

정반왕은 아들 이름을 싯다르타라고 지었는데 싯다르타는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진다' 는 뜻으로 그가 훗날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되자 그를 석가모니라고 불렀다. 석가모니는 '석가족의 성자' 란 뜻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붓다'는 옛날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수행자에게 설하기로 결심하였고, 사제(四제)를 설한다.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은 괴로움이다. 불행은 괴로움이다. 병듦은 괴로움이다. 죽음은 괴로움이다. 근심, 슬픔, 불행은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은 괴로움이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이 괴로움들은 간단히 말하면 오온(五蘊)이라고 말하였다. 붓다는 즉 괴로운 심리 상태와 그것의 소멸이 불교의 처음과 끝임을 이야기한 것이고 그것이 사제인 고제, 집제, 멸제, 도제이며 제는 곧 '진리' 라고 말한 것이다.

달을 머금었다가 토하다

붓다를 따르는 제자들이 늘어나자 밤비사라 왕은 붓다에게 사원의 시초인 죽림정사를 지어 바쳤고, 코살라국의 한 부호는 많은 재산을 들여 기원정사를 지어 바쳤다.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20년이 넘게 머무른 곳이고 불자들이 자꾸 늘어나게 되자 정사의 수를 늘리면서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祈林)이라 하였으니 "달을 머금었다가 토한다" 는 뜻을 지닌  함월산 자락의 기림사는 그런 의미에서 지어진 이름이다.

경주 기림사(신정일 기자)
경주 기림사(신정일 기자)

해방 전에만 하더라도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만큼 위세가 당당했던 기림사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직후인 643년(선덕여왕 12년) 천축국의 승려 광유(光有)가 500여 명의 제자들을 교화한 뒤 창건한 후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창 하였다. '삼국유사' 에는 "신라 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용으로 환한 선왕으로부터 '만파식적' 이라는 피리를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냇가에서 잠시 쉬어간다" 는 기록이 남아있어 신문왕 이전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기에 각유(覺猷)스님이 이 절의 주지로 있었고, 선조 때 축선이 중건하였고, 정조 때에는 경주 부윤 김광묵(金光黙)이 사재를 희사하여 이 절을 크게 중수하였다. 그러나 1862년(철종 13년)의 대 화재로 113칸의 절 건물이 불에 타 버렸지만 경주 부윤 송우화(宋迂和)가 다시 지었다.

기람사 대적광전(신정일 기자)
기람사 대적광전(신정일 기자)

조선시대에 이 절은 대적광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전, 서쪽에 오백나한전과 정광여래사리각인 3층전이 있었으며 남쪽에는 무량수각과 진남루가 있었다.

현재는 대적광전을 중심에 두고 왼쪽에 약사전, 오른쪽에 웅진전, 앞쪽에는 진람루가 있으며 뜰에는 3층석탑과 새로 조성한 석등이 있다. 그리고 명부전, 산성각, 관음전, 삼신각, 주지실 등이 있으며, 산신각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매월당 김시습을 모신 영당이 있고 그 앞에 매월당의 시 한 편이 쓰여 져 있다.

잠시 개었다가 다시 비오고(시晴시雨)

잠시 개었다가 다시 비오고 비오다 가 다시 개인다. 

하늘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세상인심 이랴 

 칭찬을 하다가도 오히려 나를 헐뜯고 

 명예를 피한다더니 오히려 이름을 구한다네. 

꽃이 피고 꽃이 진들 봄이 어이 관계하며 

구름이 가고 구름이 온들 산이 어이 다투리. 

세상 사람들 잘 기억하시게 

어디서나 기뻐함은 평생에 득이 된다네.

경주 기림사(신정일 기자)
경주 기림사(신정일 기자)

김시습이 이 기림사에 머문 인연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사당이다. 이 절의 중심건물인 대적광전(보물 제 833호)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1786년에 지어진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다. 또한 이 절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짐작되는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 보물 제 1415호)이 있는데 건칠은 옻칠을 입힌 종이 부처로서 이러한 부처는 찾아보기가 매우 힘든 귀중한 유물이다. 높이가 91cm인 이 부처는 얼마 전에 금색을 다시 입혀 원래의 맛을 볼 수 없는 게 흠이다. 몇 년 전에 개관한 박물관에는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불에서 발견된 문적 54종 기칠십일책(보물 제 959호)과 부처님의 진신사리 등의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절에는 예로부터 다섯 가지의 맛을 내는 오정수(五井水)라는 물이 유명하였다

 

기림사 위 폭포(신정일 기자)
기림사 위 폭포(신정일 기자)

대적광전 앞에 세워진 3층석탑 옆의 장군수는 마시면 힘이 용솟음 쳐 장군을 낸다고 하여 인근에 널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의를 하다 발각된 뒤에 나라에서 샘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천왕문 안쪽의 오탁수는 물맛이 하도 좋아 까마귀도 쪼았다는 물이고, 천왕문 밖 절 초입의 명안수는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이 맑아지며 후원의 화정수는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북암의 감로수는 하늘에서 내리는 단 이슬과 같다는 물이다.

장군의 출현을 두려워해서 메워진 장군수만 빼고는 다른 네 곳의 각기 다른 물들을 지금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이 절에는 천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 ’라는 한약초가 있었다고 하며 그러한 사실은 한방 서에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잠시 개었다가 다시 비오고

나는 몇 년 전에 해인사 승가대학의 학승 이십 여명과 함께 이 절에 와 하룻밤을 묵었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이었다. 

이색적으로 절에서 카레 밥으로 저녁을 먹은 나는 잘 차린 과일 상을 놓고 주제넘게 "오늘의 불교현실과 일연 스님" 에 대한 강연을 하였고 그 강연 뒤풀이로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었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하며 어린 동자승 같던 그 스님들은 지금쯤 어느 절에서 구도의 행각을 계속하고 계시는지.

비는 계속 주줄 주줄 내리고 대적광전 위쪽에 자리 잡은 요사 채에서 잠은 어찌 그리 오지 않았는지, 추녀 끝으로 떨어지던 빗소리에 그 밤 얼마나 많은 사념들에 시달렸는지 

우리는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단풍잎들과 붓다의 숨결이 들릴 듯싶은 기림사를 벗어나 장항리 절터로 향한다. 

절 이름이 전해오지 않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따서 장항리 절터라고도 하고 탑정사라고도 부르는 이 절터는 골굴암에서 석굴암 쪽으로 3km쯤 가다가 개울 건너 오른쪽 언덕 위에 있다. 몇 년 전의 산사태로 계곡 좌우가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는 것처럼 절터 역시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게 위태위태한 절터에는 5층 석탑인 석탑과 파괴된 동탑 그리고 석조불 대좌가 남아있다. 지금 이 절터에는 불 대좌가 건물 터의 중앙에 자리 잡은 금당 터가 남아있고 오른쪽으로 두 탑이 나란히 서있다.

건물의 기단 규모는 동서 15.8m에 남북 12.7m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금당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층 몸돌에 문 모양과 함께 조각된 인왕상이 인상적인 5층석탑은 원래 금당 터를 중심으로 두 개가 서있었을 것이지만 1923년 도굴범이 탑 속에 있는 사리장치를 탈취하기 위해 폭파해서 파괴되고 말았다. 그 잔재가 대종천에 방치되어 있다가 1966년에야 수습되어 지금의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또한 이 절터에는 좌 불이 아니라 입불이 세워졌던 석불대좌가 남아있는데 입불상은 경주국립박물관 뜰의 머리가 잘린 석불상 들 옆에 산산이 조각났던 것을 시멘트로 조각조각 붙여진 채로 서있다. 

광배에 새겨져 있는 작은 부처인 화불 등의 새긴 수법으로 보아 8세기 쯤에 만들어진 여래입상으로 여겨지는 이 불상은 높이가 3~4m에 이르렀을 큰 불상이었을 것이다. 파손되지 않았다면 석굴암의 대불과 견줄 만큼 우수한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마음만이 아플 뿐이다. 이제 하늘에 구름은 드높고 가을꽃들이 바람에 흔들린다. 목탁소리, 불경소리 사라진 옛 절터에서 내 마음은 자구 산란해지고 돌아갈 길은 멀고도 멀었는데 문득 김시습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함은 사람의 상정인데

(요산요수 인지상정, 樂山樂水 人之常情)

나는 산에 올라서도 울고, 물에 임해서도 우네.

(아즉등산이곡임수이곡, 我則登山而哭.臨水而哭)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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