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의 한복판에 있는 선산군, 산과 물이 서로 어울려 기세가 화합하고 정기와 맑음이 모여 대대로 뛰어난 인물이 났다”

조선 왕조 선조 때의 학자인 여헌 장현광이 그의 고향 선산을 자랑했던 말이다. 이중환 역시 '택리지' 에서 “조선 인물의 반은 영남에서, 영남 인물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고 했을 만큼 이곳에서는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났다.

포은 정몽주로부터 학통을 이어 받은 고려 말의 삼은 중의 한사람이었던 야은 길재는 이곳 선산군 고아면에서 태어났다. 서른 여덟살에 고려의 충절을 지키기 위해 낙향한 길재는 강호 김숙자같은 제자를 길러냈고 김종직은 김숙자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뿐 아니라 무오사화 당시 함께 희생된 서른세명의 선비들이 김종직의 제자들이었다. 또한 사육신의 한사람이었던 단계 하위지는 선산읍 영봉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반정공신이었던 성희안이 청송의 이름난 잣과 꿀을 보내달라는 청을 받자 “잣은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 속에 있으니 내가 어떻게 구하리요”라는 답장을 썼던 청송의 원이었던 정붕이 제자들을 길러낸 곳이 그의 고향이었던 선산이었다. 

일선(一善)으로 불리던 이곳 선산은 신라 초기에 불교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고장이다. 법흥왕 14년인 527년에 불교가 신라 국교로 공인됐으나 그 전만 해도 외래종교인 불교는 뿌리를 못 내린 채 박해를 받고 있었다. 불교가 공인되기 백년 전에 위나라에서 온 한 스님이 있었다.

 열 아홉 살쯤 되었던 그 스님은 묵호자(墨胡子)라고 불리웠는데 그 스님이 다녀간 뒤에 아도(阿道)라는 스님이 시종 2명과 함께 모례 장자의 집에 왔다. 그 모습이 묵호자와 닮았던 그 스님이 머무는 동안 그 마을에 질병이 없었다. 그는 지금의 선산군 도개면에 살았던 모례 장자의 집에서 머슴 일을 하며 밤에는 불법을 전하고 있었다. 

구미 도리사(신정일 기자)
구미 도리사(신정일 기자)

그러던 어느날 아도가 신라의 서울인 경주에 갔다 돌아와 냉산 밑에 이르니 눈 덮힌 겨울이었는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해 있었다. 아도스님은 그곳에 절을 짓고 그 절의 이름을 ‘도리사’라고 지었다. 신라 최초의 절이 태어난 그 때가 신라 눌지왕 2년(418)이었다. 아도가 소 천 마리와 양 천 마리를 길렀다고 하는 곳을 지금도 쇠골이라 부르며 신라 불교의 ‘길이 열린 곳’이란 뜻인 ‘도개’가 이 면의 이름으로 이어져 온다. 

또 1975년에 이곳을 답사한 학자들의 모례의 집터로 어림되는 곳에 있는 털레샘(모례정)이 신라 초기의 우물임을 밝혀냈다. 

1976년 6월 절 둘레의 담을 보수하던 중에 아도의 석상(石像)이 발견됐고, 정면 3칸, 측면 1칸인 조사전에는 도리사의 창건인주 아도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1977년 4월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을 해체, 복원 중 금동육각탑 형태를 띤 사리구(舍利具)와 석가모니 진신사리(眞身舍利) 1과가 발견됐다. 그때 발견된 사리구는 김천의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신라와 고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간 이 절은 조선 숙종 때 불 탔고, 지금의 건물은 영조 5년 아미타불상의 금칠을 새로 해 유일하게 타지 않고 남아있던 금당암을 중심으로 지은 것이다. 그렇기에 도리사는 터만 남았고 금당암이 지금의 도리사인 것이다.

도리사 극락전 뒤편에는 우리나라의 절 어디에서도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의 석탑 한 기가 있다. 기본형태가 방형인 이 탑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단이 놓이고 그 위에 탑신부와 상륜등이 중첩됐다. 전체 높이 3.3m이며 보물제 470호로 지정된 이 탑을 현지에서는 화엄석탑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고 다만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구리 도리사 관음전(신정일 기자)
구리 도리사 관음전(신정일 기자)

도리사에는 법당인 극락전을 중심으로 태조선원(太祖禪院)과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조사전과 요사채가 있다. 도리사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계 건물로 내부에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봉안돼 있는데, 이 불상은 조선시대 양식을 띠고 있으며 높이는 129㎝이다.

중요문화재로는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도리사 3층석탑을 비롯해 아도화상 석상과 세존사리탑, 그리고 아도화상 사적비와 조선 후기의 탱화 등이 있다. 이 중 아도화상 석상은 높이 97㎝의 입상으로서 전면 너비가 좁아 기이한 감을 주나 조각의 윤곽이 뚜렷하고, 아도화상 사적비는 총 높이 296㎝, 비신 높이 197㎝로 그 뒷면에 자운비(慈雲碑)가 음각되돼있다.

구미 도리사 3층석탑(신정일 기자)
구미 도리사 3층석탑(신정일 기자)

도리사에는 탱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1876년에 그린 후불탱화(後佛幀畫)를 비롯해 1881년에 그린 신중탱화(神衆幀畫) 그리고 독성탱화(獨聖幀畫)와 칠성탱화(七星幀畫) 등이 이 절을 지키고 있고,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판목(板木) 24매가 보관돼 있다.

도리사가 들어선 이곳이 신라의 불교에 씨를 뿌린 곳임은 도리사 둘레에 주륵사의 터, 석적사의 터, 죽림사의 터, 죽자아사의 터, 보천사의 터 같은 대 가람터가 이어 확인되면서 더 분명해졌다. 도리사의 서남쪽에는 서대라는 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보면 바로 앞쪽 곧 금릉군 대항면 황악산에 직지사가 있다. 아도 화상이 도리사를 짓고 나 황악산 중턱에 좋은 절터가 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는 곳이다. 

신라 불교의 성지인 도리사가 쇠락한 것과 관련된 전설을 살펴보자. 본래 도리사에는 중이 천명 쯤 있었는데 모두 힘이 장사여서 인근 마을에 민폐가 심했다. 그 때 풍수지리에 밝은 한 선비가 중으로 변장하고 도리사 중들을 선동해 도리사 앞산에 한해 걸려 큰 돌산을 쌓았다. 그후 도리사의 중들은 힘을 잃고 절도 쇠락해져 끝내 불타버리고 말았다 한다. 즉 풍수지리로 보면 도리사는 큰 배가 물에 떠 있는 모양인데 돌을 쌓아 배가 가라앉았다는 것이다.

1975년에 낙동강가의 제방둑을 다지는 공사를 벌이며 이 돌산의 돌들을 모두 날라 둑을 쌓는 데 썼는데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돌산의 마지막 돌을 들어낼 적에 천둥이 치고 폭풍우가 쏟아져 내렸다. 그 풍수지리에 밝은 선비의 말이 옳았다는 듯이 이 돌산이 없어진 지 한해 만인 1976년 6월 18일에 아도화상이 새겨진 석상이 발견됐다.

그리고 1977년 4월 18일엔 그 전에 도굴당해 내버려져 있던 세존 사리탑을 도리사 경내로 다시 옮기는 공사 도중 우연히 세존사리탑인 금동육각 사리함이 발견됐으며 그 안에 사리병도 없이 천과 종이에 싸인 채 사리가 발견됐다. 

높이가 17cm이고 밑면이 9.8cm인 사리함 속에 들어있던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의 큰 사리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 중 가장 크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사리함과 사리는 아도 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러 올 적에 가져온 진신사리라 해 사리함은 국보 제 208호로 지정됐고 폐사에 가깝던 도리사는 한때 나라 안 곳곳의 불교신자들이 수많은 관광버스를 타고 몰려들기도 했다.

아도 화상에 얽힌 전설이 또 하나 있다. 아도가 도리사를 지은 뒤 도리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멀지 않은 해평면 금호동 국도 곁에 있는 1만2000평 쯤 되는 큰 못 앞에서 “이 못에 연꽃이의 길이 피면 나의 뜻이 살아 있음을 알라”고 했다는 것인데, 뚜렷한 수원도 없는 이 못은 큰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어 아래쪽의 논에 물을 대어 주고 여름이면 푸른 연잎으로 뒤덮인다.

그러나 한 천년 동안 걸쳐 많은 사람들이 연뿌리를 캐어내도 오히려 무성하던 이 연밭은 나라가 일본에 강점된 이후부터 연이 점차 줄어들고 꽃도 드물어져 해방되기 바로 전쯤에는 고작 몇 포기 박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자 연이 기적처럼 늘어났는데, 1977년에 도리사에서 사리가 발견된 뒤로 연은 더욱 더 번성하였다. 

“도리사 앞에는 도리꽃 피었더니,

 묵호자 가버린 뒤 아도가 왔네,

 뉘 알리요, 빛나던 신라 때 모습 ,

 모례의 움집 속엔 재뿐인 것을

선산부사를 지냈던 점필재 김종직이 선산 땅의 빼어난 열 곳 중의 하나로 도리사를 꼽으며 이렇게 노래했다. 그 노래 소리가 들릴 듯한 길을 나는 무심히 걸어가고만 있을 뿐이다. 이곳 신림동에는 통도바우라는 둥근 바위가 있는데 어떤 힘이 센 장사가 공깃돌로 쓰던 바위라고 한다. 

지금은 구미시에 편입된 선산 땅에서 한국 초기불교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도리사가 문득 그립다.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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