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의 지류로서 대전 시내를 지나는 갑천을 지나고 신탄진에 이른다. 금강의 나루터였던 이 신탄진이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된 것은 신탄진이라는 담배 이름 때문일 것이다. 신탄진에 있던 연초제조장에서 온 국민이 피우던 신탄진을 만들면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 나루터가 아닌 담배로 신탄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조그마한 신탄진 읍이 급속도로 팽창한 대전광역시에 편입되고 경부, 호남선 열차와 고속도로가 교차되는 교통의 요충지로 변모되면서 몰라보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신탄진읍 장동리에서 대덕구 장동으로 변한 장동은 본래 회덕군 일도면의 지역으로 진(긴) 골짜기가 되어 진골, 전골, 또는 장동이라 불렀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성산리를 병합하여 장동리라고 바꿨다.

계족산성(신정일 기자)
계족산성(신정일 기자)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안에서 나는 헨델의 하프협주곡을 듣는다. 그 현란함 뒤에 밀려오는 아련한 슬픔, 그 슬픔을 어찌할 것인가? 가도 가도 또 밀려오는 그 슬픔은 언제쯤이나 내 안에서 융해되고 잠재워질 것인가?문득 길 위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잊어버린 기억들이 하나 둘씩 그리움처럼 떠오를 즈음 계족산성 입구에 도착한다.

장동 자연휴양림 입구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준비한다. 앞서온 차들이 주차장을 빼곡이 채우고 벌써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한결 여유가 있다. 아침 산행이 좋은데 오늘은 너무 해찰을 했구나. 장동 휴양림에서 산성으로 오르는 길 옆 나무들에 아직 노랗고 붉은 나뭇잎들이 매달려 있고 길은 평탄하다. 엠티(MT)인지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들인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건너편 산허리에서 왁자지껄하고, 천천히 노란 낙엽송 나무들이 사열하듯 서있는 길을 걸어간다. 순환도로를 따라가다 계족산성이라고 나무 팻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오르막 산길이다.

그곳에서 한참 나무숲길을 헤쳐나가자 다시 순환도로가 나타나며 봉황정에 이른다. 계족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그곳에서부터 가파르기 이를 데 없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발에 밟혀 부스러진 채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나는 발걸음을 옮긴다. 

가파른 길이라선지 문득 땀이 나고 얼마쯤을 갔을까. 이윽고 계족산성에 오른다. 계족산성(鷄足山城)은 대전시 대덕구 장동리의 계족산(423m)에 있는 백제시대의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1,200미터이며 사적 제 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계족산 위에 있는 테뫼형 산성으로서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3.4미터, 외벽 높이는 7미터, 상부 너비는 3.7미터이다. 가장 잘 남아있는 북쪽 성벽의 높이는 10.5미터, 서쪽 성벽의 높이는 6.8미터이다. 성의 동·서·남쪽에 너비 4미터의 문지(門址)가 있다.

 또 길이 110센티미터, 너비 75센티미터, 높이 63센티미터의 장방형 우물터가 있는데, 그 아래로 약 1미터의 수로가 있다. 상봉에 봉수지(烽燧址)로 추정되는 곳이 있으며, 건물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금강 하류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성은 백제가 웅진에 도읍했을 때 청원의 문의와 청주로 통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성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이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는 이 성은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계족산성(신정일 기자)
계족산성(신정일 기자)

성벽은 납작한 자연활석을 석재로 사용한 내탁공법(內托工法)으로 축조하였으나, 동쪽 성벽 약 200미터 정도는 안과 밖으로 석재를 쌓아올리는 내외협축공법(內外夾築工法)을 이용하였으나, 현재 남문지 밖에는 지름 12센티미터, 깊이 12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린 문초석(門礎石)이 있으며, 성내에서 백제시대는 물론 신라·고려·조선시대의 토기와 자기조각이 출토되고 있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임을 증명해 준다. 특히 가뭄이 심할 때 이 산이 울면 비가 온다하여 비수리 또는 백달산이라고 불리며 조선시대에 봉수대가 있어서 동쪽의 옥천 환산의 봉수를 받아 문의현 소이산 봉수에 응하였다고 한다.

 이 산성은 그 아래에 견두성(犬頭城)과 같은 보루가 있는 것이 특징이며, 부근에 질현성(迭峴城)·능성(陵城)·내사지성(內斯只城)·우술성(雨述城)·진현성(眞峴城)·사정성(沙井城) 등이 있다.

계족산성에 서서 아래를 굽어본다. 산아래 대전을 지나 금강에 합류하기 위해 천천히 흘러가는 갑천과 경부고속도로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가 한 눈에 들러난다. 하지만 그보다도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란 낙엽송의 물결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성을 따라 거닐며 바라본 계족산성은 대전시 문화유산 해설사인 민종순씨의 말대로 옛 산성의 모습보다는 21세기형 산성으로 쌓여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어쩔 수 없지. 산성을 쌓던 기술자도 사라지고 그 대체인력으로 불도저들이 나섰으니. 산 너머 대청댐은 푸르고 그림처럼 아름답다.

대청댐은 당시 충남 대덕군과 충청북도 청원군 사이를 흐르는 물을 막아 만든 둑이라 하여 두 지역의 머릿글자를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홍수와 가뭄을 조절하고 전력을 생산하며 공업용수와 농업용수를 공급해 주는 따위의 여러 가지 일들을 한꺼번에 한다 하여 다목적댐이라고 불린다.

이 댐 건설로 인하여 충남과 충북지방의 논밭 천오백 만평이 물에 잠겼고 여기서 살던 4275가구의 25,925명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떠났다. 1975년부터 연인원 칠십만 명이 달라붙어 다섯해 만에 건설한 이 댐의 첫째 목적은 주변 지역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는 일이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80년 12월 2일 대청댐은 준공되었고 이 댐 덕분에 청주, 대전을 비롯한 충청도 사람들은 2천년 대까지 물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 이 댐은 금강 상류인 공주나 부여 부근의 하천 물높이는 말할 것도 없고 하류인 장항이나 군산의 하천 물높이까지도 조절할 수가 있어 앞으로는 비가 많이 와도 큰 수해는 없으리라 예상했지만 그것은 희망이었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큰 홍수로 농경지가 물에 잠기었다.

대전 동춘당(신정일 기자)
대전 동춘당(신정일 기자)

 

내려가는 길은 순환도로를 따라가는 길이다. 자동차들이 다니지 않은 비포장 길이 휘돌아간 곳에 나뭇잎들은 가을의 마지막 잔해를 떨어뜨리고 길은 동춘당으로 이어진다.

동춘당은 조선 효종 때 대사헌과 병조판서 등을 지낸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俊吉·1606∼1672)의 집 별당이다. 송준길은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학자로서,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이다.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나 세 살 때에 아버지 송이창을 따라 회덕 송촌으로 내려왔고, 아홉 살부터 아버지로부터 공자와 주자, 율곡의 학문을 익혔다. 이종형제인 송시열과 함께 공부했는데 이때로부터 비롯된 송준길·송시열 두 사람의 우의는 학문에 있어서나 정치적 거취에 있어서나 거의 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열여덟 살 때부터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김장생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에게 배웠다. 김장생은 송준길의 생활과 학문의 태도롤 보고 ‘이 사람이 훗날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 열아홉 살 때 진사가 된 송준길은 스물다섯 살 이후로 예안현감, 형조좌랑, 한성부판관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의 부임하지 않고 주로 송시열 등과 교우하면서 학문에만 몰두했다.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는데도 부임하지 않았던 그는 효종 8년 조정으로 나아갔고, 호조참판, 대사헌, 이조참판을 거쳐 효종 10년에 병조판서가 되면서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준비한다. 그러나 효종이 일찍 죽자 북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관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곳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나라 안 곳곳에서 찾아온 유림들에 북벌론을 강론하다가 현종 13년 이곳 동춘당에서 67세의 생을 마감했다. 동춘당은 조선왕조 때의 별당을 표준으로 삼은 건물로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나직한 기단과 아담한 몸체, 조붓한 툇마루, 단정한 지붕 매무새 등 동춘당은 곳곳에서 선비다운 얌전함과 간소함을 풍기는 집이다. 조선 후기 별당건축의 한 표본으로 꼽을만한 동춘당은 보물 제 2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동춘당 뒤편에는 ㅡ자 사랑채와 ㄷ자 안채, 두 개의 사당으로 이루어진 송준길의 고택이 있다. 인조 20년(1642)에 건립된 이 고택은 안채의 구성 등에 처음 지어졌을 때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사랑채 뒤편과 안마당 사이에 야트막한 내외담을 두어 서로의 공간을 독립시켜 놓은 점이 재미있다. 따로 떨어진 두 사당 중에서 별묘에 송준길을 모시고 가묘에 다른 선조들을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을 보여주는 이 집은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 3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동춘당 뒤편에 위치한 송준길 고택은 송준길의 제 14대 후손이 오리백숙, 닭도리탕, 갈낙전골, 낙지볶음을 파는 음식점이 되어 있었다. 세월의 흐름을 누가 막으랴 모든 것이 음지도 되고 양지도 되는 게 세월이 아니더냐.다시 길은 남간정사로 이어진다.

대전 남간정사(신정일 기자)
대전 남간정사(신정일 기자)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1607-1689)이 말년인 숙종 9년(1683)에 세운 강학당이다. 송시열은 여기서 유림과 제자들을 모아 성리학을 강론하며 지냈다. 남간정사는 고봉산에서 흘러내리는 계천가에 자리잡았고 연못 딸린 정원을 갖추었다

남간정사의 ‘남간’은 주자의 시구 ‘운곡남간(雲谷南澗)’에서 빌어온 말로 볕바른 곳에 졸졸 흐르는 개울을 뜻한다. 남간정사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 팔작지붕집으로 가운데 네 칸은 대청이고 서쪽 두칸은 방이며 동쪽 두칸은 뒤쪽 한칸이 방이고 양쪽 한칸이 대청과 연결된 누마루가 놓였다. 대청보다 한 단 높게 만들어진 이 누마루는 방에서 볼 때는 다락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아래쪽에 아궁이가 있다. 이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대청 밑으로 물이 흐른다는 점이다. 양쪽의 방은 축대 위에 세워졌고 대청은 다리를 걸치듯 공중에 떠 있다. 그 아래로 집 뒤편 샘에서 나온 물이 흘러 앞쪽 연못으로 들어가며 또 이 건물은 앞이 아니라 건물 뒤쪽으로 출입하게 되어있고, 기국정은 대전광역시 동부 소재동에 있던 송시열의 별당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조선왕조 실록에 삼천 번이 넘게 언급된 송시열은 조선 선조 40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용방리 구룡촌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송시열의 아버지 송갑조는 송시열이 태어나기 전날 밤 종가의 제사를 모시러 청산에 가있었다. 그날 밤 꿈에 공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와서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그대에게 보내니 잘 가르치게’하였다. 그런 연유로 송시열의 어릴 적 이름은 ‘성인이 주신 아들’이라는 뜻으로 ‘성뢰’라 지었고 자는 영보, 호는 우암 또는 화양동주였다.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한 송준길은 평생동안 학문과 정치 생활을 통해 맺어졌었고, 송시열은 스물 다섯 살 때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 된다. 김장생이 죽은 그 이듬해부터 그 아들인 신독재, 김집에게 배웠고, 인조 11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그는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들어갔지만 성이 함락된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뒤 낙향하였다. 봉림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1649년부터 정국의 중심에 서서 정사를 우지좌지했던 송시열은 숙종 15년(1689)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기사환국의 와중에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고 만다. 

숙종은 ‘그의 죄악은 국문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나타났으니 도사가 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는 영을 내렸다.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올라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거적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제자들이 자리가 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송시열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까셨네’라고 거절한 뒤 사약을 마셨다. 그의 나이 83세였고 1689년 6월 8일 아침이었다.

우암 사적공원에서 나온 우리들은 남간정사가 바라다 보이는 토방집에서 인삼주에 선양 새찬을 한잔씩 마신다. 금세 취한다. 내가 술에 취했는가, 역사에 취했는가, 사람에 취했는가, 취해서 바라본 십일월의 산천은 저리도 붉게 타오르다 스러지는데….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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