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황매산 영암사 (사진=신정일 기자)
합천 황매산 영암사 (사진=신정일 기자)

“관하의 길은 아득히 멀고, 세월은 나날이 지나가네. 산이 돌아 푸른 묏부리 합치고 골이 좁아 흰 구름이 짙구나. 마음 맑게 하는 곳 여기에 있으니 찬 시냇물은 돌에 부딪쳐 읊조리네.”

조선 전기의 문장가인 서거정이 합천을 두고 쓴 글이다.

박형원은 “좋은 산은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듯 천 겹이나 아득하고 절벽은 강에 임하여 몇 자나 높은가” 라고 산이 높으며 골이 좁은 합천 땅의 지세를 노래하였다.

 합천의 명산 황매산(黃梅山)은 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가회면과 산청군 차황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 정상에는 성지가 있고, 우뚝 솟은 세 개의 봉우리는 삼현(三賢)이 탄생할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왔다. 

이 지역 사람들은 합천군 대병면 성리에서 태어나 조선조 창업을 도운 무학대사와 삼가현 외토리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의 거유 남명 조식, 그리고 전두환 전 대통령을 삼현이라 들고 있고 그들이 이 황매산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믿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직 세 번째 인물은 출현하지 않았다고 한다. 

높이는 1,108m 북쪽 월여산과의 사이에 떡 갈재가 있고, 남쪽으로 천황재를 지나 전암산에 이른다. 산정상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연결되어 기암절벽을 이루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나무들과 고산식물들이 번성하고 있으며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망 또한 빼어나다. 

정상 아래의 황매평전에는 목장지대와 철쭉나무 군락이 펼쳐져 있어 매년 5월 중순에서 5월말까지 진홍빛 철쭉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인다. 

지레 짐작하기론 합천 해인사나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 치어서 황매산을 찾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우리가 너무 늦었는가. 10시가 못 되었는데도 길은 산을 찾는 사람들의 차들로 가득하다. 

이곳 황매산 자락 모산재 아래에 나라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폐사지인 영암사터가 있다.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에 있는 영암사지를 이 지역 사람들은 영암사 구질로 부르고 있다. 

신라시대의 절터로서 사적 제1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절은 해발 1,108m의 황매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정확한 창건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강원도 양양에 있는 사림사 흥각선사비 조각에 새겨진 글자에 ‘영암사(靈巖寺) 수정누월’ 이라고 기록된 것이 유일한 관련 기록이다. 

그러나 고려 때인 1014년에 적연선사가 83세로 입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이전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894년에 동아대학교 박물관에서 절터의 일부를 발굴 조사하여 사찰의 규모를 부분적으로 밝히게 되었는데, 그때 밝혀진 바로는 불상을 모셨던 금당과 서금당, 회랑 등 기타 건물들의 터가 확인되어 당시의 가람 배치를 파악하게 되었다. 

특히 금당은 개축 등 세 차례의 변화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절터에는 통일신라 때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과 삼층석탑 그리고 통일신라 말의 작품인 귀부 2개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영암사지에는 그 당시의 건물의 초석 즉 당시의 건물 축대석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발굴 결과 통일신라 말에서부터 고려시대 초기에 이르는 각종 기와편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그때 출토된 유물 가운데 높이가 11cm인 금동여래입상 1점은 8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어 영암사지의 창건연대를 어렴풋이나마 짐작케 해준다.

일주문도 없고 변변한 건물도 없이 그저 요사채만 지어진 영암사의 돌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 영암사 삼층석탑이다. 

합천 영암사지 석등 (사진=신정일 기자)
합천 영암사지 석등 (사진=신정일 기자)

영암사지 삼층석탑은 높이가 3.8m이며 보물 제 480호로 지정되었다.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방형 삼층석탑으로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을 단일석에는 가공한 4매의 석재로 구성하였다.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1주씩을 모각하였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다. 갑석의 윗면에는 2단의 범을 조각하여 상층 기단을 받치게 하였다. 

탑신부는 각 층마다 옥신과 옥개를 별석으로 만들었고 1층탑은 약간 높은 편이며 2, 3층은 크게 감축되었다.

옥신석에는 우주를 모각하였고, 옥개석은 비교적 엷어서 지붕의 경사도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렸으며 네 귀에서 살짝 반전하였다. 

처마는 얇고 수평을 이루었으며, 4단의 받침을 새겼다. 상륜부는 전부 없어졌고, 3층 옥개석의 뒷면에 찰주공이 패어 있다. 이 탑은 상층 기단과 1층 탑신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각 부재가 짜임새 있는 아름다운 탑으로 탑신부가 도괴되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다.

영암사지 뒤편으로 기암괴석이 신록과 어우러진 황매산이 보이고 그 바로 앞에 아름다운 석등이 있다. 

질서도 정연하게 천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석축에 통 돌을 깎아내서 계단을 만든 그 위에 영암사지 석등이 외롭게 서있다.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높이가 2.31m이며 보물 355호로 지정되어 있는 8각의 전형적인 신라석등 양식에서 간주만을 사자로 대치한 형식이다. 

높은 8각 하대석의 각 측면에는 사자로 보이는 웅크린 짐승이 한 마리씩 양각되었고, 하대석에는 단판 8엽의 목련이 조각되었다.

상면에는 각형과 호형의 굄이 있고 한 개의 돌로 붙여서 팔각 기둥대신 쌍사자를 세웠는데,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뒷발은 복련석 위에 세우고 앞발은 들어서 상대석을 받들었으며 머리를 뒤를 향하였다.

갈기와 꼬리 그리고 몸의 근육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나 아랫부분에 손상이 많아 바라보기가 안쓰럽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비슷하게 꽃잎 속에 화형이 장식된 단판 8엽의 양련석이다. 

화사석은 8각 1석이고 4면에 장방형 화창을 내었는데 주위에 소공(小孔)이 있어 창호를 달았던 듯하며 남은 4면에는 사천왕입상이 조각되었다. 

옥개석의 처마 밑은 수평이며, 추녀 귀에는 귀꽃이 붙어 있고 상륜부는 전체가 없어졌다. 통일 신라 말기의 미술품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작품인 이 석등은 1933년쯤 일본인들이 야간에 해체한 후 삼가에까지 가져가던 것을 마을 사람들(허맹도를 비롯한 청년들)이 탈환하여 가회면 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위치에 절 건물을 지으면서 다시 이전한 것이다.

그때 사자상의 아랫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속리산 법주사 쌍사자 석등과 겨룰 만큼 아름다운 쌍사자 석등과 금당의 기단에 새겨져 있는 선녀비천상을 바라보며,  '옛 사람들이 얼마나 지극한 정성으로 이러한 조형물들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을 금함 길이 없다. 

지금은 그을음만 남아있는 이 석등에 한 시절 불이 켜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은은하게 불이 켜진 법당 안에서는 낭낭한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불심가득한 사람들이 이 절터로 몰려들고 그들의 기도소리가 이 절터를 메아리 쳤을 것이다. 

사라진 절터에는 노오란 민들레 꽃 들과 봄꽃들이 여기저기 피어있다. 그 꽃들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한 채 발길은 영암사지 귀부가 있는 서금당 쪽으로 향한다.  

이곳 서금당 자리에는 2개의 귀부가 남아 있다. 이수와 비신이 없어진 채로 남아있는 동쪽 귀부는 1.22m이고 서쪽 귀부는 1.06m로서 보물 489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당지를 비롯한 건물의 기단들과 석등의 잔해까지 그대로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찰의 웅장함을 알 수 있는데, 이들 귀부는 법당지의 각각 동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 귀부가 서쪽 귀부보다 규모가 약간 큰데 똑바로 뻗은 용과 용두화된 귀두,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 등이 거의 흡사하다. 

동쪽 귀부의 등갑에는 전체에 육각으로 된 복각선문을 조각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한 비좌의 주변에는 아주 정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인동인권문을 조각하였다.

서쪽 귀부는 동쪽 귀부보다 평범하며 등갑에는 역시 복선갑문과 인동문을 조각하였다.

이곳 모산재 일대의 바위산은 말 그대로 절경 중의 절경이다. 마치 속초에 접어들면 속초 뒤편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울산바위 같다고 해야 할까. 곳곳이 명소라는 사람들의 감탄사가 틀리지 않다. 

드문드문 소나무와 잡목이 섞여 있고 바위산은 봄 햇살에 빛나고 여기서부터 능선 길은 바윗길이다.

바윗길이 끝나자 ‘무지개 터’라는 작은 연못이 나타났다. 물은 흐리지만 그  물에는 올챙이들이 새까맣게 떠있다. 

이곳 무지개 터는 한국 최고의 명당자리라는 말들이 전해져 온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용마바위가 있어 비룡상천 하는 지형이므로 예로부터 이곳에 묘를 쓰면 천자가 되며 자손만대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묘를 쓰면 온 나라가 가뭄이 들기 때문에 명당자리이긴 하지만 누구도 써서는 안 될 자리라고 한다. 

모산재에서 가없이 펼쳐진 합천의 산하를 굽어보는데, 명나라 때 문장가인 오종선(吳從先) '소창청기(小窓淸記)'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내는 흐르고 돌은 서 있으며, 꽃은 새를 맞아 웃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치니, 온갖 자연정경은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스스로 소란하다.” 

 송나라 때의 문장가인 소동파는 “강과 산, 바람과 달을 본래 일정한 주인이 없고, 오직 한가로운 사람이 바로 그 주인이다”고 '소문공충 공집'에서 말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가함 속에서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할 것을 바라고 있고, 자연은 내게 어떤 것도 요구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듯 무한정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정경을 보면서도 만족하지를 못하고 나는 왜 이렇듯 항상 늦은 것처럼 서두르고만 있는가? 

어차피 나 역시 자연의 한 구성원이니, 휠덜린의 시에서 “자연이 그대를 앗아 가기 전에 그대를 자연에게 맡겨라”라고 하였던 것처럼 맡겨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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