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와 제주로 가던 관리들이나 유배객들,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이나 우암 송시열,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하멜과 1894년에 동학농민군이 넘었던 고개 갈재. (사진=신정일)

[더리포트=신정일기자]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꿈이 꿈으로 끝날 때가 있고,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 때가 있다. 그것이 개인의 영달이나 이익에 관한 일일 수도 있고, 개인을 넘어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과 희망을 주는 일일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 개인에 관한 일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그때가 2000년대 초였다. 아름다운 길이면서 역사가 있는 길을 걸을 때마다 ‘이런 길을 국가에서 문화재나 명승名勝으로 지정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라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안 될 것입니다.’ 과연 말도 안 되는 말일까? 그래도 한 번 해보자 하고, 돈키호테처럼 2006년 가을 “역사의 길을 문화재나 명승으로 지정하자”는 취지를 걸고 전북 도청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지금은 성신여대 총장인 양보경 교수, 이덕일 소장, 문경새재 박물관 안태현 관장, 그리고 필자가 논객이었다, 그때 누군가 나에게 비아냥거리듯 말했다.“선생님! 무슨 길이 문화재가 될 수 있습니까?” “한 번 해보지요?” 그러나 그 세마나 개최 후 문화재청에서 연락이 왔다. “명승으로 지정해아 할 길을 선정해 달라.”
그 뒤 그 사람을 만나자 내게 말했다.

'선생님 어떻게 그처럼 놀라운 발상을 했습니까?’ 그때 나는 이렇게 답변했다. “악기 하나 잘 쳐도, 노래 한 곡조 잘해도 인간문화재가 되는데, 오천 년 역사 속에 켜켜이 쌓인 길이 문화재가 되지 말란 법 있습니까?“

그때 문화재청에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된 길이, 문경새재, 죽령 옛길, 구룡령 옛길, 관갑천 잔도, 계립령이라고 불리는 하늘재였다. 역사의 길이 이 땅에 만들어진 오랜 세월이 지나 명승으로 새롭게 거듭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문화재청에서 유서 깊은 옛길을 ‘명승’으로 지정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서른세 곳을 추천하여, 그중 열 곳을 간추려져 심사를 했다.

그 때 명승으로 지정된 길이 일곱 개였고, 그 중에 조선시대 9대로 중 한 곳으로 7로인 삼남대로 중 전남과 전북을 사이에 두고 조성되었던 갈재였다. 

갈재 길.

삼남대로는 서울 남대문에서 남태령을 지나고 수원의 지지대 고개, 평택의 진위와 천안을 지나 차령을 넘고, 공주 논산, 여산, 삼례, 전주, 태인, 정읍에서 갈재를 넘어, 장성, 광주, 나주, 영남, 강진을 거쳐 해남의 이진항에서 제주에 이르는 길이다. 삼남대로 중 가장 중요한 고갯길인 갈재는 역사 속에서 전라도와 제주로 가던 관리들이나 유배객들,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이나 우암 송시열, <하멜표류기>의 저자인 하멜과 1894년에 동학농민군이 넘었던 고개다. 

옛날에 장성 청암역에서 갈재를 넘으려면 고개 밑 원덕리에 있던 미륵원에서 쉬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야 했다. 고갯길에서 강도를 만나기 일쑤라 중종 때인 1520년에는 군대를 파견했을 정도였던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갈재는 전라남도의 관문으로서 예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곳이다 보니 이 고개에 얽힌 전설들도 많다. 

옛날, 오가는 길손들이 아픈 다리를 쉬었던 갈재의 주막집에 갈애라 불리는 딸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뒷산 미인바위를 둘러싼 영롱한 구름 속에서 예쁜 처녀가 나와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딸을 낳았는데, 그 때문인지 갈애는 너무나 예뻤다. 숱한 선비들이 갈애에게 넋을 잃었으며 장성현감까지 갈애에게 홀려 공사를 돌보지 않고 공금까지 탕진했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장성으로 어사를 보냈지만, 그 어사마저 갈애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자 어사와 갈애를 처벌하기 위해 또 선전관을 보냈다. 장성에 도착한 선전관은 어사와 갈애가 자는 방에 뛰어들어 어사의 목을 벤 후 갈애의 얼굴을 내리쳤다. 그때 갑자기 음산한 바람이 일고 공중에서 여인의 울음소리가 나더니 자리에 핏자국만 남긴 채 갈애는 사라져버렸다. 그 후로 미인바위의 오른쪽 눈썹이 칼에 맞은 듯 찌그러졌다고 한다. 

원덕리 마애불을 보고서 서북쪽에 있는 신목란 마을에 도착해서 갈재, 즉 노령(蘆嶺)으로 가는 길을 물으려 했지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결국 지레짐작으로 고개를 찾아 넘어갈 수밖에 …. 높지 않은 고개이긴 하지만 고개는 고개다. 여기서 정읍까지는 18km쯤 되는 거리여서 시간상의 여유가 조금 있다. 그런데 사라진 옛 고개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산을 오르자 금세 땀이 난다. 하지만 가다가 길이 제대로 이어질지 아닐지를 몰라 더욱 두렵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예상대로 길은 사라지고 없다.

불과 수십 년 전만해도 수많은 장꾼들이 넘나들었고 백여 년 전에는 나주 장성으로 남행했던 동학군 수천 명이 정읍을 거쳐 전주를 지나 한양으로 가리라던 큰 꿈을 안고 넘었던 노령, 즉 갈재가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길을 가까스로 찾았는데, 대박이다.

대관령이나, 구룡령 엣 길 같이 V자가 파여진 곳이 하늘빛이 푸르다. 여기가 갈재 정상이로구나. 하고 바라보니 바위벽에 영세불망비가 새겨져 있지 않은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뚜렷이 보이는 글자, 장성부사 홍병위洪秉瑋의 영세불망비다.

1871년에 장성부사로 부임했던 홍병위가 갈재 길을 넓히고 보수했기 때문에 장성부 사람들이 영원히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세운 비다.

홍병위의 영세불망비. (사진=신정일)

갈재 옛길은 입암산 626과 방장산734 사이에 조성된 길로 정읍과 장성을 연결하는 고개다. 고개는 약 2.3키로미터의 구간으로 한참 동안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았어도 

원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구름까지 치솟은 갈재 등성이.
저 아래 지는 석양 굽어 보지만
내 고향 장안 만은 보이지 않아.
아득히 바랄 따름 돌아갈 수야.
기운길 수레로는 가기 어렵고,
바람 많아 옷 자락 걷어잡누나.
저 하늘 가는 기러기 바라나보니.
넘으려다 다시금 돌아서 날아

김창협金昌協의 시 <노령>으로 <농암집>에 실려있는 이처럼 고색창연한 삼남대로를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 우암 송시열이 넘었다.

수많은 유백개들이 넘었던 고개 마루에 장성부사 송덕비가 세워져 있으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세월은 갔어도 그 비가 남아 길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구나.
그래,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일제 때 호남선 열차가 생기고 자동차가 생기면서 1번국도가 새로 만들어지고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지다가 어느 사이 아주 끊어지면서 잊혀졌던 길이 오늘에야 다시 나타난 것이다. 

영남대로의 문경새재나 관동대로의 대관령 옛길이 재조명 되면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땀을 흘리며 넘고 있는데,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멀어졌던 길이 다시 나타났구나.

길은 그것에서부터 이리저리 휘돌아가고 힘들여 찾은 길을 따라서 얼마쯤 내려오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려온다. 가쁜 숨을 내쉬며 물가를 찾아 내려가 바닥에 엎드린 채 벌컥벌컥 마신다. 옛 호남선 열차가 지나던 폐굴에 이르고 드디어 갈재를 넘었다. 갈재 입구에서 바람을 쐰다. 제법 쌀쌀하다.

옛날에 장성 청암역에서 갈재를 넘으려면 고개 밑 원덕리에 있던 미륵원에서 쉬거나 여러 사람이 무리를 지어야 했다. 고갯길에서 강도를 만나기 일쑤라 중종 때인 1520년에는 군대를 파견해야만 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노령보(蘆嶺堡): 고개 길이 사나워 전에는 도적이 떼를 지어 있으면서 백주에도 살육과 이탈을 하여 길이 통하지 않았는데, 중종 15년에 보를 설치하여 방수(防守)하다가 뒤에 폐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힘들여 찾은 길을 따라서 얼마쯤 내려오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려온다. 

갈재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이 전북 정읍시 입암면 등천리(登川里) 군령마을이다. ‘군령(軍令)다리’라고 부르는 군령마을은 예전에 군량미(軍糧米)를 저축해 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군령다리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가 예전에 돌부처가 셋이 있었다고 해서 삼부리 골이다. 등천리 중심에 있는 마을이 마을 뒤에 장군봉이 있고 마을 앞으로 큰 길이 나 있는 홍거리마을이며 바로 위쪽에 있는 마을이 장재동마을이다. 

서쪽으로 보이는 입암저수지 바로 아랫마을이 조선시대에 삼례도찰방에 소속되어 있던 천원역(川院驛)이 있던 천원이다. 역말 또는 천원이라고 부른 천원 가운데에는 역터인 역마(驛馬) 터가 있다. 천원 가운데에 있는 도내기 새암(우물)은 이곳에서도 시오리가 훨씬 넘는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사람이 그 마을에 있는 용호동의 용쏘에서 구경을 하다가 낫을 잃어버렸는데, 이 샘에서 찾았다는 이야기가 서린 샘이다. 

 조선시대 문장가인 매월당 김시습도 이곳 천원역을 지나다 누각에 올라서 시 한편을 남겼다.

  언덕 펀펀하고 먼 나무가 그럴듯한데
  희미하게 인가에 접해 있구나.
  땅 기름져 밭에서는 차조를 거두고
  산이 낮아 차(茶)를 공물 한다오.
  갈재에는 구름이 암담한데,
  능악(愣岳) 묏부리가 뾰족하구나.
  강호의 경치를 수습하고서
  올라가니 해가 반쯤 기울었더라.
   
이 시를 보면 이 일대에서 당시에 차를 재배하여 나라에 공물로 바쳤음을 알 수 있는데, 요즘 정읍의 여러 곳에서 차를 재배하고 있는 것은 그 옛날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바람도 쉬어가고, 구름도 쉬어 넘던 갈재. 흐르는 세월 속에 사라져 가던 갈재가 우리나라 옛길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길로 알려져서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니, 이 또한 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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