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화암사 (사진=신정일 기자)
양주 화암사 (사진=신정일 기자)

천보산 자락의 회암사 터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 위치한 고려시대의 절터 회암사터는 면적이 1만에 평에 달한다.

「신증동국여지 승람」, 「양주목불후조」에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 길을 따라 인도하여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라는 기록과 함께 고려 때의 스님인 보우의 비문에 “13세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 출가하였다”라는 내력이 실려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기록들에는 회암사를 인도의 스님으로 고려 땅에 들어와 불법을 폈던 지공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화상은 당시 인도 최고의 불교대학이었던 나란타사를 본떠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창건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공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산수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나란타절과 같다”하고 말한 후 절을 지었다고 전한다. 지공화상은 1363년에 열반에 들고 1376년 지공회상의 제자이며 고려 말의 뛰어난 스님이었던 나옹화상이 중건불사를 하게 된다. 회암사는 드디어 전국 사찰의 본산이 되면서 수많은 승려들과 대중들이 머물게 되었고 절의 승려 수가 3천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4년에 걸친 불사를 마치고 낙성식을 열고 있는 중에 갑작스런 왕명이 내려온다. 나옹스님을 밀양의 영원사로 옮기라는 것이었다. 회암사는 당시의 서울인 개경과 가까운 거리에 있어 나옹을 찾는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고 특히 나옹의 법력에 이끌린 전국의 부녀자들이 일손을 멈추고 길이 막힐 지경으로 몰려들어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나옹화상은 왕명을 받아들인 후 회암사를 떠나 여주 신륵사로 향하자 수많은 대중들이 길을 가로 막았다. 나옹은 결국 57세에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든다. 그 뒤 나옹화상의 제자 각선스님이 회암사의 불사를 마쳤다.

그때 집이 262칸에 15척되는 불상이 7구나 있었으며 10척의 관음상을 모셨다고 한다. 목은 이색은 「회암사주조기」에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하여 동방에서 첫째”라고 적었고 이 절은 그 뒤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가 중건한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은 자초 즉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였고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침례 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성계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과 함께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곳에 머물렀음을 입증이라도 하듯 2000년 6월 쯤 이성계와 무학대사 등의 호칭이 새겨진 대형 청동 풍탁(건물 추녀에 매달던 종)이 발견되었다. ‘왕사묘엄존자(王師妙嚴尊者)’ ‘조선국왕(朝鮮國王)’ ‘왕현비(王顯妃)’ ‘세자(世子)’라는 15자(字)가 새겨져있어서 새삼 시공을 초월한 역사가 근거가 있었음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전국 사찰의 본산 회암사

회암사는 성종 3년(1471)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3년간에 걸쳐 중창하게 되었고 명종 때에 이르러 크게 중창하게 된다. 불심이 깊었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가 회암사를 중심으로 불교 중흥을 기도한 것이다.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를 열고(1565년 4월 5일) 그 이틀 뒤인 4월 7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유생들은 보우를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사월 초파일날 제주도로 유배당한 보우대사는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피살당하고 나옹화상 이후 이 백여 년간에 걸쳐 전국 제일의 도량이었던 회암사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되며 불태워졌다. 순종 때인 1800년대에 폐사가 되었다고 알려진 회암사는 또 다시 수난을 당하게 된다.

회암사터 북쪽 한쪽의 부도 전에 모셔져 있던 지공, 나옹, 무학대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 유물이 광주의 토호 이응준에게 제거되고 만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그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예산 가야사라는 절터를 금당 터에다 부수고 모셨던 것처럼 당시 대부분의 지방토호들은 절을 빼앗아 자신들 선조의 묘택으로 삼고자 했다. 이응준은 그 당시의 이름난 풍수사 조대진이 “삼화상의 부도와 부도비를 없애버린 후 그곳을 묘역으로 삼고 법당 터에다 묘지를 세우면 크게 길한다..”고 부추기자 이를 실행했다. 이 일은 7년 뒤에(순조 28년 1828) 세상에 알려졌다. 이응준과 조대진은 외딴 섬으로 유배를 갔고 경기 지방의 스님들의 모여 상의한 결과 현재의 절터에서 800여m 떨어진 천보산 중턱에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이어받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산 언덕배기에 세분의 부도와 부도비를 다시 세우고 흩어진 유물들을 수습했다는 기록이 무학대사의 음기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과정 중에 지공선사와 무학대사의 부도비의 몸돌은 복구되지 못하고 말았다.

양주 회암사지 부도 (사진=신정일 기자)
양주 회암사지 부도 (사진=신정일 기자)

회암사에 남아 있는 문화유산으로는 무수한 석조유물들과 함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1506년에 조성된 가로 54cm, 세로 30cm의 감지에 금물로 그린「회암사 약사삼존도」가 있을 뿐이다.

좌측에 서있는 공장과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지나 회암사지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질서도 정연하게 배치된 축단과 계단 치장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대웅전 터로 장려한 석축들과 위로 532개나 남아있는 주춧돌도 그렇지만 현재 발굴되고 있는 곳에 드러나는 절의 짜임새를 보면 전라도 지역의 미륵사터나 경주 황룡사지의 장엄함에만 길들여온 우리들의 정신을 놀라움으로 가득 채운다.

특히 맨 앞쪽 축대 정면 계단석엔 둥근 북 모양 안에다 태극 문양을 새겨 궁궐 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 절 곳곳에 들어서 있던 전각들의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관음전, 미타전, 동․서승당, 동서파침, 고루, 사문루, 열중전, 향적전, 도사료, 자빈후, 양근방 등이다.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었다.

발굴 중에 있는 회암사터, 석축과 계단을 차례로 올라가면 그 끝머리에 회암사의 흥망 을 지켜보았을 회암사터 부도가 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2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부도탑은 8개의 널돌로 된 8각 기단 위에 4개로도 하대석에는 용마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그 위에 놓인 두 개로 된 8각 하대석, 중대석에도 각 면에 연당초문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뒤에 다시 당초문을 두른 중대갑석이 있고 팔부신중을 조각했다.

중대석과 상대석 사이의 갑석엔 복련과 화려한 꽃무늬 양련으로 빈틈없이 돌리고 3단의 받침대를 놓은 다음 둥근 몸돌을 얹어 조선시대 부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 모양새나 수법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건립 연대와 부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일설에는 보우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1472년 회암사 중창 때에 이 절을 중창했던 처안(處安)대사의 공적을 기린 부도 탑으로 보는 설이 더 유력하다.

절 입구에 세워져 있는 회암사터 당간지주와 회암사터 부도만 온전하게 서있는 채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그 옛날의 모습들을 떠올리고 있을 뿐이다.

현재의 회암사는 순조 28년에 이응준에 의해 훼손된 유물을 보존하기 위해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절을 벗어나 천보산 등산로 변으로 통하는 언덕에 올라서면 줄지어 서있는 부도와 부도비 등이 줄을 이어 서있다.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회암사를 중심으로 좌청룡의 탄탄한 등어리에 해당한다는 이 언덕에 지공화상의 부도와 석등이 있고 아래 쪽에는 무학대사의 부도와 석등이 있으며 맨 위쪽으로 나옹선사의 부도와 석등이 서있다.

 

양주 회암사지 부도 (사진=신정일 기자)
양주 회암사지 부도 (사진=신정일 기자)

맨 아래쪽에 자리 잡은 무학대사(無學大師)의 부도(보물 제 388호)는 그가 입적한(태종 7년 1407년) 그 해에 건립했는데 조선시대 부도 중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탑 주 위에 여덟 개의 돌기둥을 8각으로 돌려세우고 그 사이마다에 돌난간을 두른 뒤 그 안에다 8각원당형의 부도를 세웠다.

부도의 각 층 마다에 용, 구름, 연꽃 등을 섬세한 솜씨로 조각해 아름답고 우아하기 이를 데 없다. 부도 탑을 떠받들고 있는 지대석은 한 장의 8각형 돌로서 각 면에는 구름무늬를 굵은 선으로 조각하였는데 각 모서리의 구름무늬가 유난히 크다.

하대석은 16겹의 복판연화문이 귀꽃과 함께 화려하게 조각된 복련대이며, 중대석은 8각의 3단 받침을 마련하고 양렬을 돌려 파게 했으며 상대석 위의 탑신은 원형으로 표면에는 운룡문이 가득히 조각되어 있다. 특히 용머리와 몸체, 비늘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생동감이 있으며 구름무늬 또한 뒤엉킨 채 몸체에 빈틈없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과 달리 8각을 이루는 옥개석으로 연목이 뻗어 있으며 추녀는 평이하지만 부드럽게 모양을 내어 자연스럽다. 부도탑 바로 아래 무학대사의 부도 앞에 촛불공양을 올리는 듯싶은 쌍사자 석등이 있다. 보물 제389호로 지정되어있는 쌍사자 석등은 상하 평면은 방형이고 지대석과 하대석은 한데 붙여서 만들었다. 그 뒤로 간석은 쌍사자로 대신하여 신라 시대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나의 돌에 서로 엉거주춤 쭈그리고 있는 쌍 사자는 가슴과 배가 서로 붙어서 입체감이 없으며 엉덩이가 밑에 닿아서 하체의 표정이 매우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에 가까운 복실복실한 머리털과 사자의 뒷모습은 바라볼수록 예쁘다. 상대석은 하대석과 같이 8엽 앙화(仰花)가 조각되어 있고 화창은 앞 뒤 두 곳에 두었다.

추녀가 날렵하게 들어 올려진 목조건축물의 지붕 같은 이 쌍사자 석등은 높이가 2.5m이며 청룡사 보각국사 정혜원융탑과 비슷하다.

쌍사자석등 아래에 있는 무학대사 부도는 부도탑이나 석등과는 달리 특별한 문양이나 조식이 없이 단조롭게 만들어진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1호로 지정되어 이 부도 비는 높이가 3.4m 너비는 0.9m 두께는 30cm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어 있는 지공(指空)화상 부도와 석등은 1370년 원나라에서 지공의 제자 달예가 지공의 사리를 봉안해 고려로 가져오자 나옹(懶翁)화상이 회암사에 봉안하고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워졌다. 맨 아fo 쪽에 있는 지공화상의 부도비는 부도가 만들어진지 2년 뒤인 1374년에 이색이 비문을 지어 나옹화상이 세웠다. 지대석 위에 4각의 높은 굄대를 놓았으며 237Cm 키의 비신을 세운 다음 목조 건축 형식의 지붕돌을 얹었고 전체 높이는 365Cm이다. 부도는 8각 지대석 위에 상중하기단을 두었으나 문양이나 조식이 없이 단조롭고 소박하며 석등은 왕릉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장명등처럼 생겼다. 지공화상의 부도를 돌아다보고 한 20걸음쯤 산 위로 오르면 나옹화상의 부도와 석등을 만날 수 있다. 나옹화상의 부도와 석등은 그가 불법을 깨닫고 가르침을 베풀었던 이곳 회암사와 그가 열반에 들었던 여주 신륵사 등 두 군데 있다. 그러나 신륵사에 세워진 부도와 석등이 회암사 터에 있는 것보다 3년 뒤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적 감각이나 여러 가지 정황들이 큰 차이가 있다. 이곳에 있는 나옹화상의 부도나 석등이 지공화상의 부도와 석등과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신륵사의 부도는 조선시대의 새로운 모델로 등장하는 석종형 부도이다 나옹화상의 부도 비는 한 곳에 있지 않고 삼성각 뒤편에 있다가 몇 년 전에 산불로 불에 그슬려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얼마 전 다시 복원 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 비는 당비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비로 개석이 없다. 즉 이수를 별도로 만들지 않고 비신 상부에 쌍룡을 조각하고 그 중앙에 제액을 만들어 “선각왕사지비”라는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다. 보물 제387호인 화강암으로 된 이 비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가 썼다. 비문에 따르면 왕사의 휘는 혜근, 호는 나옹이었고 초는 원혜이고 영해 부 사람이다. 이비의 글씨는 예서로써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 고구려비 후 처음으로 쓰여 진 것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중국의 원나라, 명나라에서도 예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예서연구가 얼마나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해 볼 수가 있다. 《동국금석편》에서 나옹화상의 비를 “팔분서인데 태정하나 신채가 없다”고 평하였지만 결구도 임정하고 필력도 주경하며 예법을 깊이 터득한 것으로 중국의 「희평석경」을 방불케 하는 우수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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