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발산초등학교의 문화유산

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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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던 1940년대 군산 개정의 발산리에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일본인이 자기 정원의 치장물로 조성하기 위해 석등(보물 234호)과 오층석탑(보물 276호)을 완주군 봉림사터에서 옮겨갔다. 몇 년이 지난 후 해방이 되면서 시마타니 농장에는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섰다.

1995년에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 산의 명혈이라고 알려진 곳에 꽃았던 쇠말뚝 뽑기와 중앙청의 철거로 나라가 시끄러웠지만 발산초등학교에 쓸쓸히 서있는 30여점의 불교유물들이나 정작 고쳐야할 일본식 지명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 발산초등학교 문화유산들의 표지판에는 완주 봉림사지 석등과 석탑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군산 발산리 석등, 석탑이라고 쓰여져 있다. 우리 단체를 비롯한 전북지역의 뜻 있는 사람들이 몇 년을 두고 그 유물들을 원적지나 보존상 어려운 점이 있다면 전주 국립박물관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여러 곳으로 진정했는데도 이행이 되지 않고 있다.

현재 발산초등학교 자리에 농장을 만든 시마티니 야소야는 어떤 사람인가? 시마타니 야소야는 야마구찌현(山口)에서 태어나 술을 만드는 주조업으로 재산을 모았다. 그는 일본 술의 원료인 쌀을 싸게 구매하고자 군산에 왔다가 군산 지역의 땅값이 헐한 것을 알고 1903년 12월, 그 당시 7만원으로 발산리 인근의 토지를 구입하여 농장을 시작했다. 1909년에는임피 외의 2개 면의 486정보의 농지를 보유한 군산 굴지의 농장주가 되었고 고리대금업으로 호남5대 부호라고 불일 정도로 큰 재산을 모았던 사람이다.

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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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농장이었다가 지금은 발산초등학교의 운동장은 쌀을 건조하던 건조장이었고 학교 건물이 있는 곳은 쌀을 저장하던 창고였다.

그 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있던 자리는 농장의 사무실과 안채가 있었고. 안채의 뒤쪽에 3층 건물의 귀중품을 저장하는 금고가 안채와 회랑으로연결되어 있었다.

발산초등학교 동쪽 담장 부근에 농장소유의 정미소가 있었으며, 강당 자리에는 큰 창고가 있었다.

이곳 농장에 집착이 강했던 그는 해방이 되어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고국인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까지 미군정청에 한국인으로 귀화를 신청했다.

끝까지 귀국을 거부한 그는 군산지역의 마지막 일본인 농장주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나 결국은 미군정청의 강제적 권유로 손가방 두개만을가지고 부산항에서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본국에 돌아갔다.

그 당시 큰 재산을 모은 일본인들은 수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조선의 문화재에 손을 뻗었는데, 시마타니 야소야의 취미가 골동품 수집가였다. 그는 전국에 있는 조선의 옛 미술품과 석조예술품을 불법으로 모아들였다.

발산초등학교 뒤편에는 히마타니 야소야의 켈렉션이라고 할 나라 곳곳에서 가져온 석조유물이 즐비하게 서 있다. 보물로 지정된 석등과 오층석탑을 비롯 30여 점의 석조물이 있는데 그 중 모물로 지정된 석등과 석탑은 시마타니 야소야가 인근에 있던 소작농들을 동원하여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에 있던 폐사지 봉림사터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가져 온 것이다.

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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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인 그 당시에도 조선유물보호법이라는 것이 있어서 문화재의 매매와 이동을 금지했는데, 시마타니 야소야를 비롯한 일제의 부유한 농장주들에게 그 법은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에 불법을 자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농장에 조성된 졍원위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석조유물들과 각양각색의 보물로 가득한 금고를 바라보는 시마타니 야소야의 기분이 어떠했을까?

시마타니 야오야 농장의 금고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옥구지방 우익인사들을 감금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한 때는 폐품창고로 이용되었다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남아있는 금고에는 어떤 귀중품들이 들어 있었을까?

그 무렵 농장에 근무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금고의 지하에는 옷감과 음식류를 저장했었다. 2층에는 농장의 중요한 서류와 현금이 들어 있었고, 3층에는 조선의 고 미술품들을 보관했다고 한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골동품들은 해방 이후 미 군정에서 보낸 박물관 관계자들이 군용트럭을 가지고 와 다 실어갔다. 그때 수많은 보물급 문화재들이 중앙박물관으로 이관되었는데, 어떤 문화재들이 있었는지는 알길이 없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특이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었다.

대표적인 유물이 원주시 부론면에 있던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이었고 해방 이후에야 되찾아올 수 있었다. 합천군 가회면의 영암사지 석등은 면사무소까지 가져갔다가 마을 사람들의 강력한 반대로 가져가지 못했고. 연곡사 동승탑도 가져가려다 못 가져간 문화재 중의 한 점이다.

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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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타니 야소야의 유물약탈은 봉림사지에서 그치지 않았다. 1927년 부여군 은산면 각대리어 5층석탑을 발산리 자신의 농장으로 옮겨왔는데 1936년에 밀반출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시마타니 야소야가 완강히 거부하자 총독부에서도 더 이상 어쩌지 못했다는데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였다는 각대리 5층 석탑도 그 뒤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군산에 살고 있던 다케다라는 일본인은 1932년 2월 군산지역의 이모라는 조선인과 짜고. 충남 예산군 덕산면 옥계리의 오층석탑을 몰래 가지고 와 당북 초등학교 자리의 농장주이자 군산 지역 유지였던 모리키쿠에게 팔았다.

그러나 그 자체가 불법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서 예산군에 돌려주었다.

또 하나의 유물이 부안 개암사에 있던 오층석탑인데 1932년 4월 29일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를 보자.

“옥구 군수 최화수씨가 군산 시내에 있는 하월 대명목욕탕 터 이라고 하는 요정에서 본래 개암사에 있던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국보급 가치를 지닌 5층석탑을 발견하여 신고했는데 발견자 최군수는 본래부안군수를 지낸 인연으로 5층석탑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 뒤 개암사 오층석탑을 옥구군수가 매입하여 개암사에 돌려 보냈다는데, 현재 그 석탑은 부안에이나 군산, 그 어디에도 없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 석탑은.

그뿐만이 아니다. 전국 최고의 농장주였던 구마모토는 고종황제가 사용했던 침대와 소파를 자신의 농장 저택 거실에다 들여놓고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군산은 그런 의미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던 약탈문화재의 집결지였다.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는 “과거의 역사는 인간이 남긴 모든 진리의 이야기이다.“ 라고 하면서 역사의 과거와 현재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이익은〈성호사설〉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다. “정신이란 모습 속에 있는 것인데, 모습이 이미 같지 않다면 어찌 정신을 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내 바램과 달리 가까운 시일 안에 봉림사터의 문화유산들이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대둔산이나 금산가는 길에 또는 그윽한 절 화암사 가는 길에 폐사지 봉림사터에 들러 아름다운 문화유산인 봉림사터 석등과 석탑 그리고 전북대 박물관으로 시집간 불교유물들을 만나고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답사여행이 될까? 일제 잔재 청산작업은 말로만 또는 거창한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일제가 강제로 옮겨가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봉림사지 유물들이나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 같은 문화유산들을 원적지로 되돌려 놓는 일 또한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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