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석남사와 미리내 성지

신정일 기자
신정일 기자

 

전라북도에 “살 제 남원 죽어 임실”이란 말이 있듯이 이쪽 지역에선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으로 간다.”라는 말이 있다. 살기는 진천이 좋지만 죽은 혼령이 머무는 명당자리는 용인이 많기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내 노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조상의 묘를 용인 땅으로 많이 옮기고 있다. 길은 배티고개를 넘는다. 백곡면 양백리에서 안성군 금광면 상중리로 넘어가는 배티고개는 조선시대에 신천영(申天永)이라는 사람이 반역의 뜻을 품고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이곳에 주둔하자 북 병사를 지냈던 이순곤이 의병을 모아 맞서 싸워 반역의 무리들을 물리쳤다. 이때부터 신천영이 패한 고개라 하여 패치(敗峙)라고 부르던 것이 오늘날의 배티란 이름으로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곳에 오다보면 천주교 배티 성지라는 팻말들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천주교 탄압 당시 난을 피하여 이 서운산 자락에 은거하며 옹기장사로 연명해가던 천주교도 30여명이 관군에 붙잡혀 학살당한 곳이다.

배티고개를 넘자 중앙 컨트리클럽으로 가는 표지판이 보이고 그 바로 아래에 석남사 가는 표지판이 서있다. 1.3km 석남사 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새 한여름처럼 계속 길옆에는 자동차들이 즐비하게 늘어 서있고 계곡에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점심을 먹고 있다.

서운산의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석남사(石南寺)는 조계종 제 2교구 용주사의 말사로서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당대의 고승 석선(奭善)이 개산하면서 창건했다. 그 후 문성왕 18년(856)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국사(廉居國師)가 주석하면서 중수했고, 고려 광종의 아들 혜거국사(慧炬國師)가 크게 중건하는 등 이름 높은 스님들이 석남사를 거쳐 갔다. 따라서 이들 스승을 흠모하는 수많은 제자들이 찾아들어 수행지도를 받았으니, 석남사는 당시 수백인의 참 선승이 머물렀던 수행도량이었다.

이에 세조는 석남사의 전통을 살리고 수행도량의 면모를 지켜가도록 당부했다. “석남사에 적을 둔 모든 승려의 사역을 면제하니 수도에만 전념토록 하라”는 친서교지(親書敎旨)를 내렸던 것이다. 그 뒤 석남사는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를 당하고 영조 때 해원선사(海源禪師)가 중수했으나 본래의 절 모습을 되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대웅전과 영산전 뿐이지만, 영산전(보물 제 823호)은 조선 초기 건물의 특정 양식을 손색없이 지니고 있어 당시의 절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신정일 기자

석남사에는 현재 영산전과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08호인 대웅전, 향토유적 제 11호인 고려시대 오층석탑 2기가 있고, 절 입구에 향토유적 제 28호인 석종형 부도 2기가 있다.

한낮이라서 인지 석남사에는 스님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요사 채에선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만 다소곳하게 들려왔다. 석남사 영산전과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에는 이미 져버린 철쭉꽃들이 그 아름다웠던 추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고 영산전은 모든 분들이 활짝 열려 있었다.

“수고하고 무겁게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문득 성경구절이 생각나고 나는 자그마한 석탑 두기가 호위하고 있는 듯한 영산전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여러 형상의 금빛 옷을 입는 나한상들을 바라다본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세상을 잊은 모습으로 모든 사물들과 모든 사람들을 바라다보게 될까 석남사 영산전은 보물 제 823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공포를 갖춘 팔작지붕집이다. 석남사 영산전은 특히 공포의 짜임새가 조선 초기와 중기 사이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내외 2출목으로 각 기둥 사이에 공간포(空間包) 1조씩을 짜 맞추어 견고하고 균형감 있는 외관을 이루고 있다.

바람은 살랑살랑 불고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아무리 시원하다 손쳐도 아니 떠날 수 없고 천천히 천천히 대웅전 쪽으로 걸어 올라간다.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대웅전은 본래는 영산천 아래쪽에 있었다고 한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할 때 발견된 기와 장에 영조 1년에 법당이 중건되었음이 표시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석남사는 조용하게 부우연한 안개 속에 그렇게 서있었고 다시 길을 내려가 서운산으로 오르는 산행 길을 따라 500m쯤 산길을 올라갔다. 거의 다 올라왔을 것이다. 생각했는데 바위가 없다. “어디쯤 있어요.”하고 소리를 지르자 “여기로 오세요” 김현준 기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산 위쪽으로 수풀 속에 석남사 마애여래좌상은 숨은 듯 서있었다. 얼마 전 드라마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태봉국의 궁예처럼 찌푸린 채로 서있는 마애여래좌상은 바위 질감이 좋지 않은지 마모가 심했고 코는 어느 때 누가 떼어갔는지 없어졌던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은 듯 하다.

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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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6m 폭 8m의 바위 면을 가득 채워 5.3m의 마래여래좌상을 조각했는데 조선시기로 통일 신라 때 내리는 고려 초기로 보고 있다.

마애여래좌상 앞에 놓여 져 있는 자두 맛의 캔디 하나씩을 나누어 먹고 녹음 우거진 숲길을 천천히 내려오면서 오늘 하루를 돌아다보니 불현듯이 명나라 사람 하위연何偉然이 지은 구사嘔絲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안목이 좁고 보면 그 품이 넉넉하지 않고, 마음이 좁고 보니 걸음걸이도 크지 않다. ”

​신정일 기자
​신정일 기자

한편 안성시에서 40여리 떨어진 앙성면 미산리의 미리내 마을은 한국 초기 천주교의 산 역사를 간직한 마을로 김대건 신부의 묘소가 있다.

우리나라의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의 본관은 김해로 충청남도 내포에서 독실한 천주교도 부모사이에서 태어났다. 천주교의 탄압을 피하여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을로 이사를 와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부모님에게서 천주교의 교리를 익혔다.

헌종 2년(1836)에 프랑스 신부 모방한테 영세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 등과 함께 중국의 마카오에 건너가, 파리 외방 전교회의 칼레리 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서양학문과 프랑스어. 라틴어 등 을 배웠다. 그 후 마카오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183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 가서 공부하여 6개국어를 익히었다. 헌종 8년(1842) 프랑스 군함 제독 세실의 통역관으로 있다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헌종 11년(1845) 고국을 떠난 지 9년 만에 돌아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교에 힘쓰다가 페레올 신부를 데려오기 위하여 쪽배를 타고 중국 상하이에 건너갔다. 거기서 탁덕으로 승품되어 24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페레올.다블뤼 두 신부를 데리고 충청남도 강경을 거쳐서 귀국하였다. 그는 지방전도에 나서 10년 만에 고향에서 어머니를 만났으나, 아버지는 순교한 뒤였다.

신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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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 12년(1846) 최양업과 다른 신부의 입국을 위하여 비밀 항구를 찾다가 나바우 성당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끌려온 김대건은 40회에 걸친 문초를 받고 그해 9월 새남터에서 참수형을 받고 죽었다.

목이 잘린 김대건의 주검은 그대로 형장 주변에 버려지듯이 묻혔는데, 신도인 이민식이 몰래 그 무덤을 파헤쳐 그 주검을 꺼냈다. 그는 김대건의 시신을 업고 150리 길을 밤에만 달려서 일주일 만에 이곳 미리내로 와서 새 무덤을 만들었다. 그 뒤 김대건의 무덤 곁에는 프랑스 선교사였던 주교 페레울과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슬라, 그리고 이민식이 차례로 묻혔다.

1925년 7월 5일 로마교황 비오 XI세로부터 복자위에 올림을 받았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우리나라에 와서 직접 거행한 시성식에서 가톨릭의 성인 자리에 올랐다.

‘은하수’라는 뜻의 아름다운 우리말로 불리고 있는 미리내는 경기도 광주, 시흥, 용인, 양평, 화성, 안성 일대 등 초기 천주교 선교지역 중 하나였다. 이곳이 미리내로 불리게 된 사연이 이채롭다. 신유박해(1801년)와 기해박해(1839년)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어온 천주교신자들은 교우촌을 형성하여 살았는데, 밤이면 밤마다 집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달빛 아래 비치는 냇물과 어우러져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미리내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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