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상원사 관대걸이 (신정일 기자)
평창 상원사 관대걸이 (신정일 기자)

오대산 상원사와 적멸보궁

오대산 상원사의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은 잘 닦인 산책로처럼 정갈하다. 특히 가을 단풍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울긋불긋한 단풍잎들의 사각거리는 합창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발길을 옮기면 온 세상이 달리 보인다. 푸르게 솟은 전나무와 울울창창한 산의 속살을 헤치고 아침 안개라도 피어오르면 발길은 소풍 나 는 어린아이의 발걸음처럼 가볍다.

다섯 암자 중에서 중대의 사자암은 오대산의 으뜸 봉우리인 비로봉의 산허리에 있는데 위치뿐 아니라 불교의 교리와 신앙 면에서도 중심이 되는 곳이다. 오대산 이 문수보살의 산이라면 이곳은 그가 타고 다닌다는 사자를 암자의 이름으로 삼을 만큼 큰 역할을 떠맡았던 곳이다. 그곳에서 한참을 더 오르면 나타나는 적멸보궁은 일찍이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석가모니의 정골사리, 곧 머리 뼈 사리를 모신 곳으로 오대산 신앙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이다.

적멸보궁은 석가모니 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이곳을 찾는 참배객들은 먼저 그 아래의 오솔길 가장자리에서 솟아나는 용안수(이곳의 땅 생김새는 용을 닮았으며 적멸보궁은 용의 머리, 용안수는 용의 눈에 해당한다고 한다)에서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은 뒤에 발길을 위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정면 3칸, 측면 2칸 건물인 적멸보궁의 어디에 석가모니의 머리뼈사리가 있는지는 알 길이 없고 적멸보궁인 만큼 불상도 물론 없다. 건물 뒤쪽의 석단을 쌓은 자리에는 50센티미터 크기의 작은 탑이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것은 진신사리가 있다는 세존진신탑묘다. 이렇게 온 산이 부처의 몸이라고 볼 수 있으니 신앙심 깊은 불교 신자들이 오대산이라면 월정사나 상원사보다 적멸보궁을 먼저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대산 비로봉 아래 용머리에 해당하는 이 자리는 조선 영조 때 어사 박문수가 명당이라 감탄해 마지않았던 터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오대산에 올라온 박문수는 이곳을 보고 “승도들이 좋은 기와집에서 일도 않고 남의 공양만 편히 받아먹고 사는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라고 하였다. 세상에 둘도 없는 명당자리 에 조상을 모셨으니 후손이 잘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적멸보궁이 있는 상원사

적멸보궁에서 내려오면 상원사 청량선원에 이른다. 이곳 상원사에 ‘단종애사’ 의 악역 세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얼마 못가 괴질에 걸리게 된다.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을 찾은 세조가 월정사에 들러 참배하고 상원사로 올라가던 길이었다. 물이 맑은 계곡에 이른 세조는 몸에 난 종기를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몸을 씻고 있었는데, 동자승 하나가 가까운 숲에서 놀고 있었다. 세조는 그 아이를 불러 등을 씻어달라고 부탁하며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어주었다는 말은 하지 마라”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라고 대답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 (신정일 기자)
평창 상원사 문수동자 (신정일 기자)

깜짝 놀란 세조가 두리번거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자신의 몸을 괴롭히던 종기가 씻은 듯이 나은 것이다. 감격에 겨운 세조는 화공을 불러 기억을 더듬어 동자로 나타난 문수보살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고, 그 그림을 표본으로 하여 나무를 조각하였다. 이 목조문수동자좌상 (국보 제221호)을 상원사의 법당인 청량선원에 모셨다.

다음 해에 상원사를 다시 찾은 세조는 또 한 번 이적을 경험했다. 상원사 불전으로 올라가 예불을 드리려는 세조의 옷소매를 고양이가 나타나 물고 못 들어가게 했다. 이상하게 여긴 세조가 밖으로 나와 법당 안을 샅샅이 뒤지게 하자, 탁자 밑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숨어 있었다. 고양이 덕에 목숨을 건진 세조는 상원사에 ‘고양이의 밭’이라는 뜻의 묘전을 내렸다. 세조는 서울 가까이에도 여러 곳에 묘전을 마련하여 고양이를 키웠는데, 서울 강남구에 있는 봉은사에 묘전 50경을 내려 고양이를 키우는 비용에 쓰게 했다고 한다.

이런 일들을 겪은 세조는 그 뒤에 상원사를 다시 일으키고 소원을 비는 원찰로 삼았다. 오늘날 건물은 1947년에 금강산에 있는 마하연 건물을 본떠 지은 것이지만, 이름 높은 범종이나 석등은 이미 그때 마련된 것들이다.

상원사는 청량선원, 소림초당, 영산전, 범종을 매달아놓은 통정각 그리고 뒤채로 이루어진다. 한국전쟁 당시 군사 작전으로 오대산의 모든 절을 불태웠을 때도 상원사는 문짝밖에 타지 않았다. 30년 동안이나 상원사 바깥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참선한 것으로 이름 높은 방한암선사가 본당 안에 드러누워서 “절을 태우려면 나도 함께 불사르라.”고 일갈하며 절과 운명을 같이하려는 각오로 버텼다. 그런 연유로 어쩔 수 없이 문짝만 불태웠다고 한다. 방한암선사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신화처럼 전해지는데, 이곳에서 불법을 닦는 이들은 선사가 고요히 앉은 채로 입적한 사진을 돌려보며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오대산 신앙의 중심이 되는 중대의 사자암에 가면 선사가 이곳으로 올 때 짚고 와서 꽂아놓은 지팡이가 뿌리를 내려 해마다 잎을 틔운다는 단풍나무를 볼 수 있다.

평창 월정사 (신정일 기자) 
평창 월정사 (신정일 기자) 

상원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단풍나무가 곱고도 찬연하게 우거져 있고 그 길 의 끝자락에 펼쳐진 전나무 숲 우거진 곳에 월정사가 있다. 선덕여왕 12년(643) 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하지만 한국전쟁 때 깡그리 불타버리고 역사의 흔적으로 남은 것은 별로 없는데, 한국불교연구원이 발행한 《월정사》에서는 월정사라는 명칭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승(寺僧)의 말에 따르면 오대산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 아래 세운 수정암이 훗날 월정사가 되었다. 월정사(月精寺)의 ‘월’ 자와 만월산(滿月山)의 ‘월’ 자를 연관시킨 이러한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강릉 불우(佛宇)〉조에는 월정사와 수정암이 별개의 사찰로 기록되어 있어 사승의 이 같은 이야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화마로 손실된 월정사에는 옛날의 모습을 보여주는 문화 유적이 흔하지 않다. 적광전 앞 중앙에 서 있는 팔각구층석탑과 그 탑 앞에 두 손을 모아쥐고 공양하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석조보살좌상뿐이다.

팔각구층석탑은 자장율사가 건립했다고 전해오지만 고려 양식의 팔각구층석 탑을 방형 중심의 3층 또는 5층이 대부분이었던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기에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고, 고려 말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자장율사가 월정사를 세웠다는 《월정사중건사적비》(이휘진, 1752년)의 기록이 있는데도 고려시대의 탑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고려시대에 와서야 다각다층석탑이 보편적으로 제작되었으며, 하층 기단에 안상眼象과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상층 기단과 괴임 돌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주를 비롯한 북쪽 지방뿐 아니라 묘향산 보현사에 팔각십삼층석탑이 있고 여러 곳에 팔각다층탑이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 양식을 계승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탑을 세웠던 때를 아무리 올려도 10세기 이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한국전쟁 때 석재가 파손되고 기울었던 것을 1970년과 1971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복원 당시 진신사리와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연대를 확인할 수 있을 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탑의 높이는 약 15.2미터로, 다각다층석탑으로는 가장 높다. 아래위로 알맞은 균 형을 보이며, 각부에 확실하고 안정감 있는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 다각다층석탑의 대표가 될 만하다고 여겨져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신정일 기자)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신정일 기자)

팔각구층석탑 앞에는 석조보살좌상이 놓여 있다. 탑을 향해 정중하게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두 손을 가슴에 끌어 모아 무엇인가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연꽃등을 봉양하고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왼쪽 팔꿈치는 왼쪽 무릎에, 오른쪽 팔꿈치는 동자상에 얹고 있는 보살좌상은 웃고 있는 듯 보이는데, 마멸이 심해 보살좌상인지 동자상인지조차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보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약왕藥王 보살상’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으나 그 명칭에 대 해서는 단정하기 어렵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자장율사가 팔각구층석탑을 조성할 때 함께 세웠다고 하나, 탑과 함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의 문신인 정공권은 그의 시에서 “자장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金殿은 문 닫았고 향연은 싸늘한 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하고 노래하였다.

오대산 월정사의 탑은 보수공사라 보이지 않고, 탑을 향해 경배하던 보살상만 사진으로 남아 그 탑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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