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 ( 사진 = 신정일 기자 )
 평택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 ( 사진 = 신정일 기자 )

소삿들은 안개가 자욱하다. 조금씩 안개는 걷히는 듯하지만 그 어디를 봐도 흐릿하기만 하다. 도시의 소음은 요란한데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 걸어갈 길은 평택의 송탄과 조선시대의 큰 길목이었던 진위, 오산을 거친 후 화성을 지나 수원성까지다. 경지정리가 잘되어 있는 소삿들은 오랜 옛날 이곳이 쓰라린 전쟁터였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안개 속에 아스라하다.

평택시 소사동 원소사 마을에는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인 김육(金堉)의 ‘대동법기념비(大同法記念碑)’가 서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비는 조선 효종 때 김육이 충청감사로 있을 당시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賦役)의 불공평을 없애기 위하여 호서지방에서 실시한 대동법(大同法)이 좋은 성과를 거두자, 대동법 시행을 만인에게 알리고 백성을 생각하는 그 덕을 기념하기 위하여 효종 10년(1659)에 이곳에서 남동쪽 약 50미터 지점 언덕에 세웠던 것을 1970년대 현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치던 폐단을 없애고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는 납세 제도인데, 대동법을 시행한 후부터는 공부의 불균형과 부역의 불공평이 없어지고 민간의 상거래까지 원활해졌다.

잠곡(潛谷) 김육(金堉)은 어린 나이에 임진왜란을 겪었고 광해군을 폐위하는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목격하는 등 격동기를 살았다. 그의 5대조인 김식(金湜)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실현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기에 그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젊어서 벼슬에 입문했지만 서인이었던 그는 당시 집권파인 대북파 정인홍과 문묘배향을 놓고 한바탕 격론을 벌인 끝에 대과의 응시자격이 박탈되어 고향인 잠곡으로 내려가서 스스로 호를 잠곡이라 지은 채 은둔의 생활에 접어들었다.

김육은 그때부터 소외된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기도 했다. 다음의 시는 그런 그의 심중을 반영하고 있다.

옛 역사를 읽고 싶지 않다네.

그것을 읽으면 눈물만 흐른다네.

군자(君子)는 항상 곤욕을 당하고

소인은 흔히 득지(得志)하거늘

저 요순의 아랫 시대에는

하루도 정치가 잘 된 적이 없네.

생민生民이 무슨 죄가 있는가?

창천(蒼天)의 뜻이 아득하기만 하네.

인조반정으로 대북파가 물러나자 정계에 복귀한 그는 1624년(인조2)에 음성현감으로 부임했는데 도착하고 보니 고을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수탈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도망을 쳐서 집들은 거의 다 비어 있었고, 논밭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어 황폐한 채 묵혀 있었다.

김육이 지은 <잠곡집潛谷集>에는 그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현에 도착한 뒤에 경내를 두루 살펴보고 묵혀진 밭을 알아보았더니 잡목만 우거진 밭인데도 아직도 조세를 매기고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빈집인데도 계속 호세를 거두고 있었다”고

그 후 다시 중앙정계에 복귀했다가 충청도 관찰사로 내려온 그는 특산물을 관에 바치는 공물이 가장 큰 폐단임을 알고 공납을 대동법에 의거하여 쌀과 베로 환산한 뒤 한 가구당 베 한 필, 쌀 두말로 통일하여 내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농민은 전세와 대동세를 한차례 납부하기만 하면 세납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농사에만 힘을 기울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효종은 그것을 받아들여 제도로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치가 문란해지고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중앙에서의 수요가 날로 증가하게 되자 폐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대동법에 의하여 거두어들인 쌀 가운데 지방의 각 도(道)의 영(營). 군(郡)에 저치(儲置)하는 유치미(留置米)의 대부분을 서울로 납부하게 된 각 고을에서는 국가에 조세로 바쳐야 할 상납미(上納米)의 수량을 계속 늘려갔고, 선혜청의 양해를 얻어 부족한 경비를 자꾸 농민들에게 부담시키며 탐학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던 조선시대 공물제도의 모순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를 처음 건의한 것은 율곡 이이였다. 이이는 1569년(선조 2)에 그의 저서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대공수미법(貸貢收米法)을 건의하였으나 실시하지 못하였다.

 평택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 ( 사진 = 신정일 기자 )
 평택 김육의 대동법 기념비 ( 사진 = 신정일 기자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군량 부족에 봉착하였으며, 그래서 정부는 공물 대신에 미곡으로 납세하도록 장려하였다. 그러나 전쟁 중에 군량을 조달하려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전쟁이 소강 상태로 접어든 1594년(선조 27),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은 대공수미법을 제안하고 이 제안은 1결에 쌀 2말씩을 징수하도록 하여 그 해 가을부터 전국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징수한 쌀의 양이 매우 적고 수시로 현물로 징수하는 일도 많아 1년이 되지 않아 폐지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농민의 공납 부담이 높아지면서 공납의 폐해가 다시 일어났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호조참의 한백겸(韓百謙)은 대공수미법 시행을 제안하였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이 이를 재청하여 1608년 5월에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할 것을 명했다.

1623년(인조 1) 조익(趙翼)의 건의로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에도 실시되었으나 강원도를 제외한 충청도 전라도의 대동법은 다음 해 폐지되었다. 이후 대동업의 확대 실시론이 간간이 제기되다가 효종 즉위 후, 김육과 조익 등이 삼남에 대동법을 시행하자고 강경히 주장하였으며, 이 후 대동법은 갑오경장 직전인 고종 31년(1894)까지 계속되었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일은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

조선시대 7대로가 갈리던 소사점

‘대동법기념비’ 앞에는 대동법을 찬양하는 이종철을 비롯한 역대 군수들의 비도 서 있어 ‘원님 덕에 나발 분다’는 속담이 생각이 난다. 비석을 뒤로 하고 발길을 재촉하는데, ‘소삿들 쌀’이라는 양곡 저장창고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바로 이곳 평택시 소사동에서 평택과 광천을 지나 충청수영(忠淸水營)으로 가는 7대로가 갈라졌으며 그래서 소사점(素沙店)이라는 주막도 있었다. 원래 소사점에는 큰 장이 섰기 때문에 안성의 공도면 사람들이나 평택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한양을 오가는 길손들이 많이 모여들곤 했는데, 신작로가 철도를 따라 서쪽으로 나면서부터 장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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