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사에서도 크고 작은 싸움이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7세기 초에 일어난 몬테베르디(C. Monteverdi)와 아르투지(G. M. Artusi)의 논쟁이다, 혁신가 몬테베르디는 초기 오페라의 중요한 선구자이며 오늘날까지도 무대에 올려지는 <오르페오 Orfeo>를 작곡한 인물이다. 보수적인 아르투지는 르네상스식 대위법으로 유명한 볼로냐에서 활동하던 이론가였는데, 전통적 대위법 규칙을 자꾸 깨어버리는 몬테베르디가 못마땅했다. 몬테베르디는 규칙을 벗어나는 자신의 새로운 음악 양식을 제2 작법(seconda prattica), 르네상스의 엄격한 대위법 양식을 제1 작법(prima prattica)라 명명하고, 어느 것도 버리지 않고 두 가지 모두를 적절히 조화롭게 사용하는 것이 다가오는 시대에 필요하다고 천명했다. 그것을 증명하고자 옛 양식으로 미사곡을 작곡하고 새 양식을 바탕으로 저녁기도 음악을 작곡해 발표했다. 옛 스타일과 새 스타일로 모두 성공적인 작품을 내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6성부 미사, “In illo tempore”>와 <성모의 저녁기도, Vespero della beata Vergine>이다. 모두 1610년작이며 베네치아의 그 유명한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연주되었다. 독자들께서 한 번쯤 들어보시면 좋을 걸작들이다. 역사는 교조주의적인 아르투지를 기억하지 않는다. 몬테베르디의 제2 작법 음악들은 가사와 감정 표현에 유리하여 바야흐로 “극장의 시대”인 17세기의 시대정신에 부합하여 성공하였다. 뿐만아니라 몬테베르디의 예언이 들어맞았다. 그가 명명한 신구(新舊) 두 양식이 모양새를 조금씩 달리하면서 백 오십 년 동안 펼쳐지는 바로크 음악의 기본 틀이 되었다.

계몽주의(Enlightenment)가 무르익던 18세기 중엽 파리에도 중요한 논쟁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한 극단이 페르골레지(G. B. Pergolesi)의 막간극(intermezzo)인 작은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를 상연했는데 이것이 장안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루이 14세의 비호 아래 베르사유에서 성장한 장중하고 귀족적인 프랑스식 오페라에 익숙했던 파리의 애호가들이 간결하고, 진솔하고, 귀에 착 달라붙는 이탈리아 음악에 매료되었다. 급기야는 프랑스 음악보다 이탈리아 음악이 우월하다 말하는 파리지앵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그래도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프랑스 음악 옹호론자들(작곡가 라모를 중심으로 한 국왕파)과 “음악은 이탈리이아가 최고야”라는 이탈리아 음악 지지파들(계몽주의자 쟝 자크 루소를 중심으로 한 백과사전파)로 나뉘어 맹렬히 싸웠다. 이를 부퐁논쟁(Querelle des Bouffons)이라 한다. 표면적으로는 예술의 기호에 대한 논쟁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앙샹레짐(Ancien Régime)에 반기를 든 계몽주의자들의 다분히 정치적 선동의 성격이 있었다. 그것은 오래지 않아 18세기 말 대혁명으로 뇌관이 터지게 되는 휘발성 짙은 프랑스 지식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음악과 관련된 의미 있는 한 작은 논쟁이 있었다. 1930년 카프(KAPF)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에서 활동하던 젊은 문학인 신고송(申鼓松)과 많은 가곡과 동요 등을 작곡한 음악가 홍난파(洪蘭坡)의 이른바 ‘음악과 계급의식’ 논쟁이었다. 신고송이 <음악과 시>라는 잡지에 “음악과 대중”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것이 신호탄이 되었으며, 이를 홍난파가 동아일보에 반박문을 게재하면서 싸움이 불거졌다. 신고송은 당시 소비에트의 예술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 듯 과격한 주장을 내세운다: “부르주아 예술은 붕괴하려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기능 아래 제작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예술은 무산계급의 장성을 조성하는 목적 아래 제작되는 것이다,” “예술 가치는, 가장 가치 있는 예술은 무엇이냐 . . . . 정치적 임무를 소행할 수 있는 데 그 가치 평정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예술과 음악이 정치적 동요와 선동의 수단이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예술은 생활 조직의 한 수단이요, 감정과 사상을 전염하는 이상 필연적으로 ‘아지테이션’이고 ‘프로파간다’이다.” 신고송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서양음악의 전통을 파쇄하고 음악을 전투 의지를 고양하거나 노동자 계급에게만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센티멘탈한 멜로음악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 우리들은 로맨틱한 선율에 하등 감흥도 일으키지 않는다. 고전적인 교향악이 있다 하여도 우리와 몰교섭이다. 전장에서 전투하는 전가(戰歌)로 말미암아 신예(新銳)한 전의를 소활(蘇活)시키는 의미의 음악이 가장 우리에게 소박한 가치 있는 음악인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일일(一日)의 노동을 위무해주며 청각을 기껍게 해주는 해방된 가두음악이 우리에게 교섭이 있을 음악이다.” 신고송의 이러한 호전적인 메시지에 홍난파는 문제의 본질을 파고들어 그의 논거를 무너뜨린다. 즉 음악 자체는 너무나 추상적인 예술이어서 거기에 어떤 계급성이나 계급의식이 존재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결국 프롤레타리아 음악이란 것이 있을 만한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갓 악곡의 표제로나 혹은 악곡에 부수하는 가사의 의미로서만 계급의식을 밝힐 수 있는 것이요, 악곡 그 물건만으로서의 계급성은 있을 까닭이 없다.” 그리하여 기존의 예술 음악을 파쇄해야 한다는 신고송을 옹색하게 만든다: “음악을 가두로 진출시키지 못한 죄는 음악가에게 있을지는 모르거니와 음악 기물(其物)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에 이 편에서 계급의식을 가지고 음악 기물까지를 색안경시 함은 너무 부당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절대악(樂)인 금일의 음악을 가지고 거기에 계급의식이나 계급성을 억지로 붙인다 함은 하등의 의미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고송은 아동문학가와 연극인으로 활동하다가 1946년에 월북했다. 북에서 정치성 짙은 희곡 대본과 연극 활동으로 승승장구했으며 1951년(한국전쟁 중)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립극장 총장으로 등극하여 당시 함락된 서울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주창하던 ‘프롤레타리아 음악,’ ‘정치적 소임을 수행하는 음악’은 바로 이데올로기에 가두어진 북한식 예술론이다. 음악은 이데올로기에 묶일 수 없는, 우리의 깊은 내면 및 의식과 작용하는 훨씬 크고 풍성한 인류의 자산이다. 이념에만 매몰되어 세상을 아(我)의 이념과 타(他)의 이념으로 이분하여 내 편과 적으로만 이해하려던 한 세기 전 신고송의 모습에서 오늘날 무언가 기시감이 드는 바가 있어 글 쓴 이는 마음이 불편하다.

양승열 지휘자
양승열 지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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