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쌍계사 대웅전 (신정일 기자)
논산 쌍계사 대웅전 (신정일 기자)

논산 불영산 아래 쌍계사.쌍계사, 두 개의 계곡이 만나는 곳에 지은 절 이름으로 나라 안에 야러 곳이 있다. 하동의 쌍계사와 저남 진도의 쌍계사, 그리고 논산 얀촌면에 위치한 쌍계사가 대표적인 절 이름이다. 논산의 쌍계사를 가는 곳에서 계유정난 때 희생당한 성삼문의 묘를 만날 수 있다.

양지陽地바른 곳에 있으므로 양촌리陽村里라고 부른 사송재思松(사송티, 성삼문재)는 구리개 서쪽에 있는 고개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의 시체를 팔도에 조리 돌리다가 이곳을 지나던 중에 시체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아니하므로, 할 수 없이 자리를 정하여 산소를 썼다. 그 뒤부터 이 묘를 성삼문의 송죽 같은 충의를 사모하여 사송재, 사송티 또는 성삼문재라고 하는데, <여지도서> <은진현> ‘총묘‘에 실린 글을 보자.

성삼문成三問 총塚, 관아의 동쪽 20리, 구로현에 있다. 고을 사람들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대대로 전해온다. 옛날에 김한이라는 사람이 이곳에다 똥을 누고 쌍계사에 가서 밤에 묵었다. 꿈에 건강한 사내 하나가 와서 말햇다.

“어찌해서 내 머무르는 곳을 더럽히느냐?” 꿈에서 깨어 스님에게 물어보니 대답했다. “성 승지(성삼문)의 팔, 다리 가운데 하나가 이곳에 묻혀 있습니다. 마침내 함께 가서 파헤쳐보니 뼈가 있었다. 이에 감싼 옷을 풀어주고, 나무에 새겨서 표시했다. ” 뒤에 현감 정효성이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 쇠퇴해졌는데, 현감 여선장이 가서 찾아보았더니 자세한 곳을 찾지 못했다. 영조 12년인 1736년에 현감 이도선이 본 토박이가 가리키는 것에 따라서 봉분을 더 쌓았다. 고을의 선비 이단후가 의견을 내어 논산에 사당을 세웠다. 충신 양응춘도 함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계유정난 후에 처형당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을 육시처참형으로 처형한 뒤 이곳에 팔 하나를 묻었다는 이야기다. 슬픈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올라가다가 보면 쌍계사 가는 길에 이른다.

논산 쌍계사 승탑 (신정일 기자)
논산 쌍계사 승탑 (신정일 기자)

쌍계사를 처음 찾아가던 그때는 작달비가 내리던 늦은 여름이었을 것이다. 길이 비좁은 절골 마을에 들어서서는 길가에 세워둔 경운기 때문에 집집마다 경운기 임자를 찾아다니기도 했는데 가끔씩 찾다보니 어느새 길은 포장도로로 바뀌었고 골짜기에는 한국신약을 비롯 그림같은 집들이 여러 채 들어서 있다. 작은 저수지 위로 조선시대 새워진 것으로 보이는 부도 9기가 있다. 대부분이 석종형이고 옥개석이 있는 부도들 중에 취붕당 혜찬대사 승탑이 있고 중건비는 자연석 기단 위에 장방형 비신이 있는데 김낙중이 짓고 이화중이 글씨를 썼으며 김남조라는 사람이 새겼다고 한다.

쌍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麻谷寺)의 말사로. 이 절의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확실하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조에 “불명산 : 현동쪽에 33리에 있다. 산이 청산현 도솔산으로부터 꾸불꾸불 서쪽으로 흘러 본현으로 와서는 나란히 세 산이 되었으니 동쪽으로는 불명산 남쪽으로는 마야산 북쪽으로는 반야산이 있다.” 또한 ‘불우조’ 에 “쌍계사 : 불명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이 절에 관한 기록은 고려 말의 삼은(야은 길재, 목은 이색, 포은정 몽루) 중의 한 사람인 이색이 지은 사적기에 의하면 쌍계사는 창건주는 전하지 않고 극락전, 관음전, 선원, 동서당, 명월당, 백운당, 장경각, 향로전, 해외, 삼보, 요사 등이 있는 500~600여 칸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절은 불에 타 없어지고 고려 충숙왕 때의 대문장가 행촌 이암이 발원하여 중건하였지만 그 절 역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건물들은 조선 영조 때에 지어진 것이다.

숙종 42년(1716) 승려 자영이 2층으로 된 대웅전을 중창하였지만 영조12년 11월 화재로 전소된 것을 그 뒤 다시 세웠다고 한다. 1964년 9월 보물 제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 집은 돌축대 위에 세워진 겹처마 팔각 다포집으로 굵은 느티나무 기둥은 배흘림기둥이다.

논산 쌍계사 문살 (신정일 기자)
논산 쌍계사 문살 (신정일 기자)

기둥 위에 창방과 평방을 짜돌리고 그 위에 외사출목 내사월목의 공포를 배열하였으며 그 위에 받혀진 보머리에는 사자와 연꽃모양을 새겼다. 대웅전 안에는 높은 우물 천장을 하고 있고 석가모니를 주불로 우측에 아미타여래 좌측에 약사여래불이 따로 따로 봉안되어 있는데 제각각 화려한 닫집으로 치장되어 있다. 닫집에는 연꽃봉우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나무학들이 날아갈 듯한 자세로 정면 5칸에 매달린 2개씩의 문살에는 국화, 연꽃, 모란, 무궁화 등의 꽃살무늬들이 섬세하게 조각된 후 채색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공진회에서 이 꽃살무늬 문짝을 서울까지 가지고 가 출품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절 대웅전의 오른쪽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덩쿨로 만든 것으로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까지 고통을 면하게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절 명부전의 문 양쪽에는 다른 절에서는 볼 수가 없는 인왕상이 험상궂은 모습으로 칼을 들고 서있고 지장보살을 가운데 두고 명부시왕은 ‘어서오게’하고 손을 내밀 듯이 인자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양옆으로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조상들이 서 있다. 또한 웅진전에는 거조암의 나한들처럼 생각에 잠겨 턱을 괴고 있는 모습 마음씨 좋게 웃고 있는 모습 등 제각각의 모습의 나한상들이 이절을 찾는 사람들을 맞고 있다.

우리가 명부전에 있는 사이에도 비는 계속 내리고 내리는 빗줄기 속에 풍경 소리가 들리며 명부전 뒤쪽에 누군가의 기원과 정성이 가득 담긴 기왓장들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포개져 있었다.

비가 내려도 산은 올라가야지 대웅전에서 조금 떨어진 우측에 석조불이 모셔져 있고 그 앞에 꽃들은 꽂혀 있고, 유리창 안의 촛불은 활활 타오른다. 그렇다, 저렇게 타고있는 불꽃들처럼 시들지 않는 사랑 꺼지지 않을 희망들이 역사를 발전시켜 왔을 것이고 우리들 역시 그 역사 속에서 한 몫을 다하기 위해 이렇게 헤매이고 고뇌하고 그런 날들을 수없이 보내고 있으리라.

울울창창한 낙엽송나무 군락을 벗어나며 흐르는 물은 이슬처럼 영롱하다. 칡인지 다래 넝쿨인지 확실치 않은 넝쿨은 물 위에 걸쳐져 있고 그 위에 슬픔처럼 비가 내린다.

계룡산 갑사에 있는 월인석보 판각이 원래 이곳에서 만들어 보관되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불영산 쌍계사(지도에는 작봉산으로 나와있음)는 드문드문 찾아오는 겨울 나그네들을 그렇게 맞으면서 보내고 있었다.

논산 견훤묘 (신정일 기자)
논산 견훤묘 (신정일 기자)

쌍계사에서 나와 다시 연무읍으로 들어섰고 후백제 창업주인 견훤의 무덤이 있는 금곡리에 도착하자 멎었던 비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길옆에 차를 세우고 능으로 오르는 길 위에 선다. 봄이면 하얗게 벚꽃이 피고 초여름이면 새까맣게 익은 버찌가 길손을 유혹하는 그 길 위에 비가 내리고 견훤의 무덤 역시 빗속에 젖어 있다. 무덤 앞에 무인석처럼 서있는 프라타나스와 주변의 나무들도 비의 나그네다. 역사라는 것이 그렇다.

살아남은 자가 그것도 승리한 자가 쓰는 역사이기 때문에 죽은 자, 패배한 자의 기록들은 사라져 버리거나 지워져 버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실제 역사 속에서는 진즉에 죽었어야 할 견훤의 의형제이며 충직한 장군이었던 수달이 며칠 전에 타는 불 속으로 들어간 명장면이 방영되면서 그 가슴 벅찬 의리가 장안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푼수 같은 그의 아버지 아자개는 얼마나 희극적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견훤의 코 웃음치는 모습이나 불같은 성격들만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는 듯 싶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는데 저 내리는 빗줄기 속에 누워 계신 견훤대왕의 마음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생각하며 귀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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