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룡사 대웅전 (신정일 기자)
청룡사 대웅전 (신정일 기자)

천안 1C를 지나 거봉 포도의 고장이라고 알려진 입장에 접어들면서 시야에는 우리가 올라야 할 서운산이 나타나고 가뭄이라 물이 많이 빠진 청룡저수지를 지나 청룡사 입구에 닿는다.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프다. 그러나 슈퍼 하나 없다. 어떻게 한다. 가뭄이라 산속에도 물이 마땅치 않을 것이고 그래서 둘러보는데 다리 못미처에 도토리 묵판이 보이고 계란과 오리 알이 삶은 채로 채반에 얹어져 있다.

묵 한모에 계란 하나씩을 먹고 점심까지 예약하고서야 서운산 산행 길에 접어든다. 구부러지고 구부러진 길을 오른 뒤에야 서운산 정상 못미처에 자리 잡은 좌상사에 닿는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다른 절과는 달리 중년의 비구니 스님이 나타나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는다. 전주에서 왔다고 내가 답하자 저기 대웅전 뒤편에 물이 있으니 물만 마시고 저쪽으로 올라가시라고 사뭇 쫓는 기세다. 스님은 스님대로의 일만 하고 찾아온 나그네는 좀 쉬었다 가면 되는 것인데 느낌이 이상하다.

“예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늘어진 나무 밑에서 흐른 땀 좀 식히려 하자 담배 피우고 쓰레기 버리는 사람만 보아서 그런지 어서 가라고 성화다.

그래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말을 까 하노라”라는 말을 너무 잘 알고 그래서 “할 말은 조금 남겨두고” 라는 말을 좋아하는 내가 조금만 더 참았으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 조용한 산사를 그렇듯 떠나왔으니, 나는 가끔 이렇듯 한심하고 한심할 따름이다. 마치 김수영 시인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술회한 것처럼,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가뭄이 깊은 탓인가. 후덥지근한 날씨 탓이었는가. 그 또한 모르고 또 모를 뿐이다.

절에서 백여 미터 쯤 올랐을까 시멘트로 만든 서운정이 보이고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쌓은 서운산성이 나타난다. 서운산성은 서운산에서 뻗은 서쪽 능선에 서남쪽 방향을 해발 535m에서 460m 지점까지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싼 토성으로 둘레는 약 620m이고 성벽의 높이는 6~8m이며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여겨진다. 이 성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홍계남과 이덕남이 쌓아 안성을 방어하였던 군사요충지로 성안에는 두 의병장의 대첩을 기념한 기념비와 석불이 있다. 나는 외롭게 이 산성 안에 세워져 있는 석불을 향해 “나의 허물을 용서하소서.”하고 기도드리고 하산 길에 접어든다.

나무숲들이 우거진 하산 길에선 땀 흘려 오르는 등산객들을 만나고 나무숲 길은 서늘하다. 그래 마음속에 그늘 한 점 없기를 고요한 물결 같은 마음이기를 원하지만 가끔씩 울컥 치밀어 오르는 그 한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내 마음이여, 그 마음을 책하며 다스리며 뙤약볕 길을 내려와 청룡사 절 마당에 닿는다.

 

청룡사 대웅전 측면 (신정일 기자)
청룡사 대웅전 측면 (신정일 기자)

숙종 46년(1720) 동현거사 나준(羅浚)이 지은<청룡사 사적기>에 의하면 청룡사는 명본대사(明本大師)가 창건 1341~1367년에 나옹선사가 크게 중창했다고 한다. 이때 나옹선사가 서기어린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靑龍)을 보았다 해서 본래 대장암(大藏庵)이었던 절 이름을 청룡사, 산 이름을 서운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고려 공양왕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으나 세종 6년(1424)에 다른 곳으로 옮겼고,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원당으로 심는 바람에 사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 관음전, 명부전, 관음청향각, 대방 등이 있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9호인 삼층석탑이 대웅전 앞에 서 있으며, 조선 현종 때 800근이 넘는 동종이 있다. 절 북쪽 관음전에 1680년에 조성된 감로탱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감로탱이라고 전한다. 부속암자로는 은적암, 내원암, 서운암이 있는데 은적암은 600여년에 창건도니 암자로서 선수(仙水)라고 불리는 유명한 약수가 나온다. 내원암은 청룡사 다음해에 창건되어 48명의 강사가 계승된 유명한 강원이며 용허, 장호강백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계속되었던 선불장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곳이다. 서운암은 원래 내원암에 속한 암자로써 내원암으로 찾아오는 학승들이 너무 많아 약 100여년 전에 내원암 강주(講主)였던 만우스님이 창건한 암자이다.

청룡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각지붕 건물로서 보물 제8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축조한 기단 위에 화강석 주초석을 놓아 2위에 다듬지 않는 굽은 나무들을 그대로 세운 나무기둥을 세우고 기둥 윗몸에 창방을 얹은 위에다 또 평방을 얹었다. 평방 뒤로 내외삼출옥의 포작공포를 짜 올렸으며 전혀 가공하지 않은 원목 그대로의 고목을 기둥으로 쓴 것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

대웅전 양쪽 추녀 끝에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의 금강역사를 세웠는데 오른쪽엔 입을 굳게 앙다문 밀적금강(密迹金剛)이, 왼쪽에는 입을 벌린 채 공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이 그려져 있다. 아마도 천왕문이나 금강을 따로 세우지 않은 청룡사에서 법당 추녀에서 잡귀의 침입을 막고 부정을 다스리며 부처님을 보호하도록 묘안을 짜내 세운 것일 것이다.

 

청룡사 산신각 (신정일 기자)
청룡사 산신각 (신정일 기자)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부처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 모셔져 있는데 이는 과거, 현세 미래불을 나란히 모신 것이다. 이 절 청룡사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황석영의 장편소설 <장길산>의 남사당패에 의해서 있다. 안성군은 평택군, 천원군, 대덕군과 더불어 남사당패가 놀이판을 벌이는 큰 고을에 들었고 안성군이 남사당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학자들이 남사당 후기라고 구분하여 불렀던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남자들만으로 놀이패가 짜여 졌던 남사당패가 여자들만으로 짜여 진 사당패와 서로 섞이고 사당패와 성격이 다른 걸립패와도 한데 섞이던 때가 그때였다. 그 무렵 이 일대를 돌아다니던 남사당패들이 이 청룡사에 적을 두고 있었다. 청룡사에서는 겨울이면 이들 남사당패들을 절의 불목하니로 부리면서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대주었는데 청룡사 법당의 중수기에는 남사당 패거리에 속하는 ‘거사’라는 이름들이 당당히 올라있다. 이곳 청룡리 불당골은 이 나라 중부지역에서 노닐었던 남사당패의 본거지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청룡사와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사당패는 농사철이 시작되는 봄부터 추수가 마무리되는 가을까지 마을을 떠나 나라곳곳을 떠돌며 살다가 추운 겨울이 되면 청룡사로 찾아들었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소고(小鼓)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가네.

라는 ‘바우덕이 노래’ 속의 바우덕이는 남사당패를 이끌었던 여장부였다. 안성 바우덕이는 전국에 널리 알려졌었다. 경복궁 중건 때 노역자들을 위로하고 안성 사당패를 불러 걸판지도록 놀이판을 벌였는데, 특히 바우덕이의 노래와 춤, 줄타기는 일품이어서 일꾼들이 넋을 잃고 빈 지게만 지고 다녔다고 한다. 이에 대신들은 요망한 바우덕이를 처형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으나 대원군은 오히려 바우덕이의 가무를 칭찬하고 후하게 상을 내렸다고 전한다.

그런 사연으로 인하여 1910년경 안성 남사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변혁’을 가져왔다. 그 후 13년간 안성 바우덕이는 안성 사당패를 이끌며 악전고투를 하다가 거리에서 병을 얻어 죽었다고 전해온다.

그 뒤 세상이 놀랍도록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칠십 연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남사당패는 “단 하나 남은 마지막 꼭두쇠”라고 스스로 자처했던 남편 우씨 마 저 죽고 난 뒤에 맥이 끊어진 채 오늘에 이르렀는데 느닷없는 영화 <왕의 남자>로 부활하여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세상일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른다는 말이 진실이란 말인가?

사라진 것들이 어디 남사당 패 뿐이랴 만 그래도 그 흔적이라도 찾아볼 수 있을까 싶어 토종된장국에 밥 한상을 차려주신 노천가게 아주머니에게 “남사당패의 후손들이 혹시 남아 있나요”하고 묻자 “없어요 .우리 시어머니도 잘 모르는 일이라고 하던데요”하고 말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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