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의 한 거리에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강병융 교수 제공)
지난 4월 23일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의 한 거리에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강병융 교수 제공)

지난달 말(2023년 4월), 근무하고 있는 단과대학 앞 왕복 4차선 도로 위에 차들이 길게 늘어선 광경을 보고 사뭇 놀란 적이 있다. 근무처(류블랴나 대학교 인문대학)는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의 시내에 자리잡고 있지만, 교통 체증과는 거리가 있다. 사실, 류블랴나 전체가 그렇다고 봐도 무방하다. 도심 혼잡도를 측정하는 지수 중 하나인 ‘톰톰 교통 지수(TomTom Traffic Index)’에 따르면, 류블랴나 도심에서 10㎞로 이동하는 데 걸리는 평균 시간은 13분 20초이고, 러시아워 시간에는 평균 시속 38㎞로 차량이 움직인다고 한다. 유럽 내에서 가장 교통 체증이 심한 런던의 경우, 10㎞를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36분이 넘는다. 러시아워 시간 평균 속도는 정확히 류블랴나보다 두 배 느린 시속 14㎞이다. 그러니 류블랴나의 차량 행렬은 놀랄만한 광경 중 하나임이 분명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도로 위를 점령하고 있던 차량이 승용차도, 승합차도, 버스도 아닌 농업용 트랙터였다는 사실이다. 커다란 바퀴의 트랙터들이 슬로베니아 국기를 달고, 경적을 울리며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분명히 의도가 있는 행렬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농민들의 저항이었다. 

강병융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교 아시아학과 교수. 소설가.
강병융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대학교 아시아학과 교수. 소설가.

슬로베니아의 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2011년에는 전체 경제의 2.14%(제조업 26.81%, 서비스업 58.12%)를 차지하던 농업의 비중이 2021년에는 1.69%(제조업 28.48%, 서비스업 57.71%)까지 내려갔다.

그 날(2023년 4월 25일), ‘살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수 천명의 농민들이 국회 앞 공화국 광장(Trg republike)에 모였고, 슬로베니아 전역에서 수도인 류블랴나로 올라온 트랙터가 무려 1500대였다고 한다. 그들은 이 땅에 농민이 설 자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현실을 개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위해 정부가 땅의 주인인 농민들의 관점에서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입법 절차가 진행 중인 동물권 보호를 위한 법안에 반대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농민들은  동물권 보호 차원에서 40시간에 해당하는 가축 관리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이에 농민들은 평생을 자연과 동물과 함께해 온 자신들이 동물권 보호라는 명목으로 교육을 의무적으로 받아야 하고, 심지어 동물 보호 단체에 감시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Natura 2000’의 과함에 대해서도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Natura 2000은 유럽 연합(EU)이 만든 자연 보호 네트워크로 생태계 보전을 위해 만든 일종의 ‘그린벨트’인데, 슬로베니아 농민들은 과도한 ‘Natura 2000’의 지정이 농민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고 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농민들의 외침에 슬로베니아의 천연자원부 장관인 이레나 신코(Irena Sinko)는 귀를 기울이고, 협상의 문을 열어두겠다고 답했다. 

시위 과정에서 농민 노동조합의 안톤 메드베드(Antona Medved) 위원장은 농부들이 소리를 높인다는 것은 그 나라가 피를 흘리며 아파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현 상황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동물권을 등한시하고, 환경 보호보다는 자신의 생존만 주장하는 농민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피가 아닌, 자신들이 그간 누려왔던 ‘꿀’을 지키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슬로베니아 농민들의 삶과 슬로베니아의 자연을 함께 지키기 위해 슬로베니아 정부가 어떤 묘안을 제시할지 지켜볼 일이다. 농부, 동물, 자연이 공존하게끔 만드는 일은 슬로베니아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의 당면 과제이기에 이번 슬로베니아 농민들의 외침이 주는 울림은 우리에게도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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