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북한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천문학적인 피해를 봤고, 북한의 대도시와 주요 산업시설은 대부분 파괴됐다. 한국전쟁 정전 직후 북한이 직면한 최대의 국가적 과제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북한 경제를 신속하게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후 재건에 필요한 역량과 재원이 사실상 부재했던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원조와 지원 없이 ‘인민경제회복’을 추진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중국과 소련은 견고한 밀월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고, 북한도 중·소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중·소로부터 경제적·안보적 지원을 얻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 중·소 밀월관계는 북한이 중국과 소련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구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조건이 됐다. 말하자면 북한은 중·소 밀월관계를 배경으로 중·소에 대해 ‘등거리 외교’를 하면서 필요한 재원을 중·소 양국에서 확보했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부터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서서히 틀어지기 시작했다. 1958년부터 불거졌던 중·소간의 갈등은 1960년대 초반부터 점차 표면화돼 갔다. 그런데 중·소 갈등이라고 하는 새로운 상황의 출현은 북한에도 매우 낯설었다. 

중·소 갈등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최대한의 안보적 지원과 경제적 원조를 얻어냈던 북한의 등거리 외교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 북·중·소 관계에 대한 기존 연구는 중·소 갈등이 발생하자 중국과 소련이 북한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북한에 구애를 보냈고, 북한은 중·소 분쟁이라고 하는 유리한 상황을 이용해 비교적 손쉽게 중소 양국에서 필요한 지원을 최대한 확보하였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우선, 중·소분쟁의 상황은 북한에 유리한 조건과 배경이 결코 아니었다. 북한은 국가의 안보유지와 경제발전을 위해 소련과 중국의 지원이 매우 절실했는데, 중소갈등의 발생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것을 중소로부터 획득하는데 매우 불리한 환경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중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북한의 ‘기생 국가적 특성’이 중소분쟁의 상황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중소분쟁 시기 북한이 중소로부터 받았던 경제적·안보적 지원은 1950년대 중·소 밀월시기보다 많이 감소했다. 따라서 이 시기 북한이 중소에 대한 ‘등거리 외교정책’을 해 중소로부터 더욱 쉽게 더욱 많은 지원을 확보했다는 기존의 설명은 근거가 희박하다. 

오히려 1960년대 중·소 갈등 시기 북한은 등거리 외교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소련과 중국을 선택적으로 지지하며 중·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 외교’를 전개했다. 예를 들어 1963년 소련이 미국과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을 맺고, 핵 개발에 나서려는 동독과 폴란드 등의 시도를 저지하려고 했을 때 노동신문을 비롯한 북한의 매체는 소련의 이러한 행위를 정통공산주의를 벗어난 수정주의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중소분쟁의 와중에서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중국을 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의 노골적인 중국 편들기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 중단으로 이어졌고, 북한에 대한 중국의 경제적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자 이번에는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만이 고조됐다. 특히 중·소 갈등의 상황 속에서 중국이 북베트남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지원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았던 것은 베트남과 비슷한 처지에서 동병상련을 겪고 있던 북한의 불신을 고조했다. 게다가 1964년 중국이 프랑스와 정식으로 수교를 맺은 사건은 중국에 대한 북한의 불신을 더욱 심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4년 10월 소련의 흐루쇼프가 실각하고 새롭게 브레즈네프 지도부가 구성되자 북한은 신속하게 소련과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브레즈네프 지도부는 북한에 대한 경제 지원을 재개하면서, 동시에 중국에 대해 ‘공동대응’할 것을 북한에 요구했고, 북한도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이처럼 북·소관계가 회복되면서 북·중 관계는 다시 경직돼 갔다.

1950~60년대 북한, 중국, 러시아(소련)는 국내외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밀월과 갈등의 관계를 반복했고, 북한은 ‘시계추’처럼 중·소 간을 왕복하는 외교정책을 구사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서 오늘날의 정책적 대안을 찾을 수 있다면, 1950~60년대 북·중·소 관계와 북한의 외교노선을 통해 현재의 한국이 찾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북·중·러의 관계가 언제나 견고한 것은 아니며 그들 사이에서 상황과 조건에 따라 틈새가 벌어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북·중·러 간의 틈새를 간파하고 더 나아가 정책적으로 그러한 틈새를 유도할 수 있는 일종의 ‘쐐기전략(wedge strategy)’에 대한 탐색과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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