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유교에 입각한 장례는 엄격하고 복잡했다. 그 하나가 '오복(五服)'이다. 

오복은 상복(喪服制度)에 관한 규칙을 말하는데, 상을 당했을 때 망자(亡者)와 혈통관계의 멀고 가까움에 따라 다섯 가지로 구분해서 입었다. 입는 기간도 각기 달랐다. 

<17세기 조선의 승려(僧侶) 오복도(五服圖) 등장과 그 특징>(김진우,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22)은 당시 조선 사회에 등장한 승려 오복도의 내용과 그 의의를 고찰한 논문이다.

앞서 서술했듯, 혈연의 친소가 먼 사람일수록 가벼운 상복을 입으며 복상 기간도 짧은데, 오복도는 이렇게 형성된 친족 관계를 원형으로 도식화한 것이다.

17세기 불교 상례서엔 '석문가례초'와 '석문상의초'가 있다. 세속의 인연 가운데 부모에 대한 정과 그들을 위한 예를 표현하기 위해 등장한 저서이다. 여기에 승려 오복도가 나온다.

조선시대 장례행렬. (출처=영월 단종문화제)
조선시대 장례행렬. (출처=영월 단종문화제)

논문에 따르면 일부 직계친과 방계친에 대한 승려의 복상 기간을 도식화하여 승려가 직계친에 대해서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로서 그들에 대한 정과 예를 다하였지만, 방계친은 혈연적으로 가까운 친족들에게만 최소한의 추모와 복상 기간을 유지하였다. 

논문은 이를 통해 "승려는 자신과 관련된 세속의 인연을 오복도에 넣어 이들에 대한 친족 관계를 형성 또는 유지하여 조선 사회에 적응하려 하였다"고 분석했다. 

이어 "승려 오복도의 등장은 전후 17세기 조선 사족이 상례와 종법을 사회에 정착시키려는 움직임과 궤를 같이하여 불교도 자신들의 방식으로 적응하고자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그 의미를 찾았다. 

오복제도는 장례가 간소화된 오늘날 시점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 글을 읽으면 MZ세대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싶다.

'인간의 감정은 그 내용에 따라서 자연히 밖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감정이 강하게 드러날 때는 복식(服飾)에까지 미치게 되므로 슬픔의 표현으로 상복이 생겼다. 그러나 슬픔은 망인과의 친소(親疎)에 따라 자연 차등이 생기므로 그것에 부합시켜 오복이 지정된 것이다.'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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