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불일폭포. (사진=신정일기자)
하동 불일폭포. (사진=신정일기자)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사는 것이 외롭고 쓸쓸할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겨라.“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말이다. 산이 흙으로 이루어진 산이고, 골짜기가 많아서 사람이 살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리산을 배경으로 쓰여진 글들이 많고 김동리의 소설 <역마>에서도 지리산의 풍경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쌍계사(雙磎寺) 세이암의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일 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일렀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갯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명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아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 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 그러나 화개장 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농악),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높이고 그립게 하는지도 몰랐다.

화개는 옛 시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루어지던 중요한 장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 옛날 화려했던 화개장터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다리 건너에 새로 만들어진 초가집도 아니고 콘크리트 집도 아닌 화개장터가 지나는 길손들에게 머물러 가라고 손짓하고 있을 뿐이다. 소설 <토지>에서 월선네가 주막을 열었던 그곳은 어디쯤일까.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용이를 기다렸던 화개장터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를 처음 심은 곳이 지리산 기슭 화개동이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곳 화개 연근에는 산자락마다 차나무가 푸르게 펼쳐져 있다.

화개장터에서 맑디맑은 화개천 물길을 따라 4킬로미터쯤 거슬러 올라가면 쌍계사에 이른다. 조선 인조 5년(1632)에 나온 <진양지晉陽誌> '불우佛宇' 조의 기록 에 따르면, 화개면 일대에 암자와 절이 53개 있었고, 이륙이 지은 <유산기遊山記>에는 그 당시 지리산의 모습이 활동사진처럼 펼쳐져 있다.

“지리산은 또 두류산이라 칭한다. 영남, 호남 사이에 웅거하여서 높이나 넓이나 몇 백 리인지 모른다. …… 시내를 따라 의신, 신흥, 쌍계의 세 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 20리 지점에 칠불사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이 있고,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물은 영신사의 작은 샘물에서 시작되어 신흥사 앞 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으로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이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았던 절들이 지금은 쌍계사와 칠불암을 비롯해 몇몇만 남았을 뿐이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10리 벚꽃길이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하동 쌍계사 마애불 (사진=신정일기자).
하동 쌍계사 마애불 (사진=신정일기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 (사진=신정일기자)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부도. (사진=신정일기자)

 

김동리가 <역마>에서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 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 있을 때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머리) 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 눈 쌓인 계곡 위 꽃 피는 곳에 봉안하라’ 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 을 옥천사玉泉寺라 하였다. 이후 문성왕 2년(840) 진감선사가 중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으며, 정강왕 때 쌍계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쌍계사의 좌우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물이 합쳐지므로 절 이름을 쌍계사라 지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되어 인조 10년(1632) 벽암스님이 중건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초입에 마치 문처럼 마주 서 있는 두 바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팡이 끝으로 썼다는 ‘쌍계雙磎’, ‘석문石門’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을 지나던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쌍계석문에 이르렀다. 최고운의 필적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는데 글자의 획이 마모되지 않았다. 그 글씨를 보건대, 가늘면서도 굳세어 세상의 굵고 부드러운 서체와는 사뭇 다르니, 참으로 기이한 필체다. 김탁영은 이 글씨를 어린아이가 글자를 익히는 수준이라고 평하였다. 탁영은 글을 잘 짓지만 글씨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은 듯하다.”

이 절도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 불탔으며, 오늘날 볼 수 있는 건물들은 그 뒤에 하나씩 다시 세운 것이다. 대웅전, 화엄전, 명부전, 칠성각, 설선당, 팔영루, 일주문 등이 그것이다. 그중 쌍계사의 대웅전은 광해군 12년(1620)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4칸의 기둥이 높은 아름다운 건물로, 보물 제458호로 지정되었다.

쌍계사의 여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은 국보 제47호로 지정된 진감선사탑비다. 경주 초월산의 대승국사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탑비, 보령 성주사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와 더불어 최치원의 사산비문四山碑文에 속하는 이 비는 쌍계사를 세운 진감선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신라 정당왕 2년(887) 에 세운 것으로 높이가 3.63미터, 폭이 1미터인 검은 대리석비다. 

신라 말의 고승인 진감선사는 전주 금마(지금의 익산)사람으로 속성이 최씨였다. 그는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는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일찍부터 소리 없고 말 없는 깊은 도의 싹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였는데, 진감선사의 탑 비에 이 절의 역사와 진감선사에 대한 글이 새겨져 있다.

“드디어 기이한 지경을 두루 선택하여 남령南嶺의 산기슭을 얻으니 높고 시원함이 제일이었다. 사찰을 창건하는데, 뒤로는 노을 진 언덕을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이는 시내를 굽어보니 안계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산이요, 귀를 서늘하게 하는 것은 돌구멍에서 솟는 여울이다.”

이렇게 절을 창건하는 과정을 기록한 다음에 진감선사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높은 데까지 오르자면 가까운 데서 부터 시작해야 하나니. 비유를 취한들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또한 공자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말이 없고자 한다. 하늘이 무슨 말이 있는가.’ 라고 했다, 그런즉 유마거사가 묵묵히 문수를 대한 경우와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가만히 전한 것처럼, 수고로이 혀를 놀리지 않고서도 능히 통해서 마음에 새기게 한다는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이것이 버리고 어디에 가서 얻을 수 있겠는가“ 멀리서 오묘한 도를 전해 와서 우리나라를 빛나게 한 붐이 어찌 다른 사람이겠는가. 선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쓴 것으로 알려진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에 적힌 이 글은 천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모든 글자들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데, 한국 전쟁 당시 총알에 맞은 자국이 여기저기 뚫려 있어 옆구리에 쇠판을 대고 있다.

하동 불일사. (사진=신정일기자)
하동 불일사. (사진=신정일기자)

쌍계사에서 조금 올라가서 좌측으로 가면 만나는 절이 국사암이고, 그곳에서 불일암과 불일폭포는 2k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불일폭포로 가는 길은 한적하면서도 아름답다. 이 길을 오래 전에 걸었던 사람이 무오사화의 주인공 탁영 김일손이었다.

“쌍계사 동쪽 골짜기를 따라 다시 지팡이를 짚고 길을 떠났다. 돌층계를 오르기도 하고 위태로운 잔도를 기어오르기도 하면서 몇 리를 가자,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만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다. 그리고 생각해봤다. 우리들은 이곳애 올 수 있었는데, 이인로는 이찌하여 이곳에 오지 못했던가?(...)

앞으로 수십 보를 가자 가파른 골짜기가 나타났다. 잔도를 타고 올라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불일암이라 하였다. 암자가 절벽 위에 있어 앞은 낭떠러지였고, 사방은 산이 기이하고 빼어나 이를 데 없이 상쾌하였다.(...) 아래에는 용추에 학연鶴淵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청학동이라고 일컫는 곳은 불일평전을 이르는 말이다.

김일손의 뒤를 이어 이 길을 걸었던 사람이 남명 조식이었다.

“쌍계사에 그대로 머물렀다. 호남순변사 남치근이 이인숙에게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조식이 지리산 유람 길에 올랐던 때가 1558년이었는데 지리산에서 인연을 맺었던 남치근은 1562년에 황해도를 무대로 활동했던 대도 임꺽정을 잡았던 인물이다. 남명의 글은 다음으로 이어진다.

”아래에는 학연이 있는데, 까마득하여 밑이 보이질 않았다. 좌우 상하에는 절벽이 빙 둘러 있고, 층층으로 이루어진 폭포는 문득 소용돌이치며 쏜살같이 쏟아져 내라다가 문득 합치기도 하였다. 그 위에는 수초가 우거지고 초목이 무성하여 물고기나 새도 오르내릴 수 없었다.

천 리나 멀리 떨어져 있어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약수弱水도 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아서 겨우 그 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끼를 걷어내고 벽면을 살펴보니, 삼선동三仙洞이라는 세 글자가 있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조식의 글을 보면 그 당세에도 삼선동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고, 불일폭포를 학연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에 이곳을 찾았던 유몽인의 

글에 불일폭포의 위용이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여산의 폭포 높이가 얼마나 더 되는지 모르지만 우리 나라 긴 폭포로는 개성의 박연폭포만한 것이 없다.그런데 이 폭포는 박연폭포와 비교해 몇 장이나 더 긴듯 하고,물이 쏟아지는 길이도 더 긴듯하다,“

깊은 지리산 속에 숨어 있어서 명승인데도 명승 대접도 받지 못한 불일폭포와 쌍계가에서 국사암에 이르는 일원을 문화재청에서 곧 국가 명승으로 지정해서 세상의 풍파에 찌든 도시 사람들이 찾아가 마음을 씻고 돌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류산이 우리나라 첫 번째 산이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인간 세상의 영리를 마다하고 영영 떠나려 하지 않으려 한다면, 오직 이 산만이 편히 은거할 만한 곳이리라.“

불일폭포를 두고 떠나올 때 유몽인의 두류산 유람의 끝머리에 쓴 글이 문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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