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숙한 골짝에서 흘러내린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짜기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 번 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화양동 파곶. (사진 신정일)
'깊숙한 골짝에서 흘러내린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짜기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 번 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화양동 파곶. (사진 신정일)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이중환은 촉망받는 학인 관리였고 문장가였으나 죄를 입고 벼슬에서 내쫓긴 채 오랜 세월 유배형을 받은 뒤 운명이 바뀌었다. 사람이 당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터인 이 나라에서 사대부들이 살만한 곳을 찾아 20년간, 이 나라 이 땅을 떠돈 뒤 이중환은 <택리지>라는 명저를 지었고 사람이 가장 살만한 곳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

“무릇 산수란 정신을 기쁘게 하고 감정을 화창하게 하는 것이다. 살고 있는 곳에 산수가 없으면 사람이 촌스럽고 거칠어진다. 그러나 산수가 좋은 곳은 생리가 풍부하지 못한 곳이 많다. 사람들이 자라처럼 모래 속에 숨어 살 수가 없고 지렁이처럼 흙을 먹지 못하는데, 한갓 산수만을 취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기름진 땅과 넓은 들, 그리고 지리가 아름다운 곳을 택하여 집을 짓고 사는 것이 좋다. 그리고 십리 밖이나, 혹은 반나절 걸을 수 있는 거리에 경치가 아름다운 산수가 있는 곳을 사두어서 가끔씩 생각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근심을 풀고, 혹은 머무르고 자다가 돌아온다면 이것은 자손대대로 이어나갈 만한 방법이다.

옛날에 주자朱子가 무이武夷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물 구비와 산봉우리 꼭대기마다 글과 그림을 그려 빛내고 꾸미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살 집을 두지는 않았다.

그가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봄철에 저곳에 가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서로 비치는 것이 또한 싫지 않았다.'

후세 사람으로서 산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것으로 본을 삼을 일이다."

이중환이 오래도록 마음을 두었던 곳이 속리산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화양동구곡이었다.

신선이 노니는 곳이라는 선유동에서 한참을 내려오면 화양동 주차장에 이른다.  화양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차도 지나지 않아 정적만이 감도는 조용하면서도 운치 있는 길이다. 한참을 내려가면 길 아래쪽으로 난 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화양천에 이르면 바로 그곳이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파곶이다.

"선유동에서 조금 내려가면 현재 그곳에서 파관巴串으로 불리는 또는 파곶이다. 깊숙한 골짝에서 흘러내린 큰 시냇물이 밤낮으로 돌로 된 골짜기와 돌벼랑 밑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천 번 만 번 돌고 도는 모양은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금강산 만폭동과 비교하여보면 웅장한 점에 있어서는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고 한다. 금강산을 제외하고 이만한 수석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 지방에서는 제일이라 할 것이다."

이중환 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우암 송시열은 1686년 3월에 이곳 화양동에 와서 <파곡巴谷>이라는 시를 지었다.

'물은 청룡처럼 흐르고, 사람은 푸른 벼랑으로 다닌다. 무이산 천 년 전 일, 오늘도 이처럼 분명하여라.'

이중환이 찬탄한 파곶의 아래쪽 바위에 앉아서 멀리 산들과 냇가를 바라다보면 세상의 경치가 이만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파곶에서 화양동 계곡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아홉 곳을 우암 송시열이 화양구곡이라고 명명했는데, 그 연원은 주자에서 비롯되었다.

주자학을 창시한 주희(朱熹)는 성리학의 탐구에 이상적인 장소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계곡으로 보았다. 그는 그러한 형세를 갖춘 계곡을 중국 남부에서 발견한 뒤 무이구곡(武夷九曲) 이라고 지은 뒤 1곡에서 9곡에 이르는 물의 구비마다 그 모양새에 함당한 이름을 붙인 뒤 성리학의 경지에 비유하였다. 이황의 뒤를 이어, 율곡 이이는 석담구곡을 지었고, 화양동 구곡에서 제자를 길러낸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조선의 사대부들은 앞 다투어 나라곳곳에  구곡을 지었다.

1975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화양동계곡은 원래 청주군淸州郡 청천면의 지역으로서, 황양목黃楊木(희양목)이 많으므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효종孝宗 때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이곳으로 내려와 살면서 화양동華陽洞으로 고쳐 불렀다.

우암 송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제자들을 불러 모은 뒤 화양동계곡의 볼만한 곳 아홉 군데에 이름을 붙이고 화양구곡이라 하였는다.

화양구곡 암서재. (사진=신정일)
화양구곡. (사진=신정일)

<제 1곡>이 경천벽이다. 기암이 가파르게 솟아 있어서 마치 산이 길게 뻗히어 하늘을 떠받치듯 하고 있어 경천벽이라 이름 지었다. <제 2곡>은 구름의 그림자가 맑게 비친다는 운영담이다. <제 3곡>은 읍궁암은 운영담 남쪽에 희고 둥굴넓적한 바위로 송시열이 효종임금이 돌아가매일 새벽마다 이 바위에서 통곡하였다 해서 후세의 사람들이 읍궁암이라 불렀다.

<제 4곡>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 또한 금싸라기 같으므로 금사담이라 하였다. <제 5곡>은 첨성대로 도명산 기슭에 층암이 얽혀 있는 곳을 말한다. 경치도 좋을 뿐더러 우뚝 치솟은 높이가 수십m이고 대아래 '비례부동'이란 의종의 어필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서 별을 관측할 수 있다고 하여 첨성대라 한다.

<제 6곡>은 능운대 로 큰 바위가 시냇가에 우뚝 솟아 그 높이가 구름을 찌를 듯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제 7곡>이 와룡암이다. 큰 바위가 냇가에 옆으로 뻗혀 있어 전체 생김이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제 8 곡>이 학소대로 옛날에는 백학이 이곳에 집을 짓고 새끼를 쳤다고 하여 지은 이름이다. <제 9 곡>이 그 이름 높은 파곶이라고 부르는 파천이다.

학소대. (사진=산정일)
학소대. (사진=산정일)

이곳 화양동에 일명 큰절이라고 부른 환장사煥章寺가 있었다. 환장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절 앞에 여덟 가지 소리가 난다는 팔음석八音石이 있고, 숭정황제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넉 자와 의종황제의 친필인 '사무사邪無邪' 석자가 보관되어 있다.

화양동 환장사. (사진=신정일)
화양동 환장사. (사진=신정일)

화양동서원이 한창 드날리던 시절 이 절의 한 스님은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의 형태만 보고도 그 사람이 어떤 당파에 속해있는 지를 정확하게 알아냈다고 한다.

예를 든다면 만동묘 앞을 지날 때 공경하고 근신한 뜻이 안 보이며 활달하게 떠들고 지나가는 사람은 진보적이던 남인南人이었다.

또한 만동묘에 이르러서 쳐다만 보아도 감개무량하게 여기고 몸을 굽혀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보수적인 노론老論이고, 그저 산수구경을 간단히 하고 만동묘 구경도 절차를 무시한 채 와서 절에 와서는 중을 곧잘 꾸짖었던 사람들은 혁신적인 노론老論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속해있던 당색이 인격이나 언동言動에까지 배어버린 것을 보면 우리 선조들은 이와 같이 당색과 인간이 절충 융합해 있었던 같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색에 대한 강인한 집념은 당색에 따라 옷의 디자인이나 헤어스타일도 달리하는 했다고 한다. 노론 가문의 부녀자는 저고리의 깃과 섶을 모나지 않고 둥글게 접었으며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으며, 머리 쪽도 느슨하게 늘어서 지었다.

이에 비해 소론 가문의 부녀자는 깃과 섶을 뾰족하고 모나게 접었다. 이처럼 모난 디자인을 ‘당唐코’라 불렀으며 소론 가문을 당코로 속칭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치마 주름 수도 많고 잘며 머리 쪽도 위쪽으로 바짝 추켜 지었고 이 같은 옷매무새나 머리모양은 그들 당의 정신과 너무나 잘 부합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곧 노소론의 분당 원인은 주자학朱子學을 둔 보수적 해석과 혁신적 해석 때문이며, 곧 보수혁신이 그 분당의 분기점이었던 것이다.

당코처럼 날카로운 디자인, 잔주름 많은 치마, 바짝 올려붙인 머리 쪽이 혁신적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고, 완곡한 옷깃, 굵은 치마 주름, 느슨한 머리 쪽은 보수적 이미지를 물씬 나게 한다.

그러한 당색들이 오늘날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져 이 당黨 저당으로 무늬만 바꾼 채 계속 유지되고 있다.

'나하고 생각이 같으면 군자君子고 나하고 생각이 틀리 면 소인小人이다.'라는 말이 하나도 변형되지 않고 진행되어 왔다. 그래서 제 눈에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끌만 보인다는 속담이 무색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말았다.

동인 서인에서 노소론과 남인북인으로 갈라져 왔고, 지금은 우파네. 좌파네 하며 서로의 등을 떠밀며 날 선 칼을 겨누고 있다. 그러한 세상 속에 당신과 나도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이곳을 지나는 길에 말에서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패대기질을 당했다는 하마비 우측에 그 이름 높았던 화양동서원과 만동묘가 있다.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은 1695년(숙종21)에 이곳에 머물며 후진을 양성했던 송시열을 제향하기 위하여 세웠는데, 이 서원의 위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 서원은 민폐를 끼치는 온상으로 변해갔고, 결국 1871년에는 노론사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원이 철폐되었다.

화양동서원에 딸린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과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다.

만동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전국의 유생 수천 명이 모여들었으며 1년 내내 선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이 서원도 화양서원과 마찬가지로 폐단이 극심해졌다. 우여곡절을 겼으며 사라졌던 이 만동묘와 화양서원이 얼마 전에야 다시 세워졌다.

산천이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역사를 배우고 사람을 배우게 만드는 길이 아랫관평에서 시작하여 선유동을 거쳐 화양동에 이르는 한나절 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자智者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仁者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動的이고 인자는 정적靜的이며, 지자는 낙천적이고 인자는 장수한다.” <논어>에 실린 글이다. 산과 물이 아름다운 이곳은 그런 의미에서 그 두 가지를 다 겸비한 곳이라고 볼 수 있다. 이보다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길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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