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화엄사 국보 우화루. (사진=신정일)
완주 화암사 우화루. (사진=신정일)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언제나 마음속에 남아서 ’오라‘고 속삭이는 절 화암사 가는 산길은 적막하다.

어느 계절에 가건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고적하고 그윽한 절, 그리고 격조 있는 문화유산이 남아 있는 화암사로 가는 정경이 15세기에 쓰여진 <화암사중창기華巖寺重創記>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절은 고산현高山顯 북쪽 불명산佛明山 속에 있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봉우리들은 비스듬히 잇닿아 있으니, 사방을 둘러보아도 길이 없어 사람은 물론 소나 말의 발길도 끊어지지 오래다. 비록 나무 하는 아이, 사냥하는 남정네라고 할지라도 도달하기 어렵다. 골짜기 어구에 바위벼랑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에 이른다. 골골의 계곡물이 흘러 내여 여기에 이르면 폭포를 이룬다. 그 바위벼랑의 허리를 감고 가느다란 길이 나 있으니, 폭은 겨우 한자 남짓이다. 이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야 비로소 절에 이른다. 절이 들어선 골짜기는 넉넉하여 만 마리 말을 감출만하며, 바위는 기이하고 나무는 해묵어 늠름하다. 고요하되, 깊은 성처럼 잠겨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고 땅이 감추어둔 복된 땅이다.” 

복된 땅을 밟으면 복을 받는다고 했던가, 화암사 가는 길은 더욱 고요하다. 아쉬운 것은 오르기 힘들었던 바위벼랑 아래 철 계단이 놓여서 그 옛날의 정취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절의 내면을 속속들이 아는 사람만이 오르던 그 길이 고려 때 사람 백문절白文節의 글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어지러운 산 틈 사이로 급한 여울 달리는데, 우연히 몇 리 찾아가니 점점 깊고 기이하네. (중략)

조용히 와서 하룻밤 자니 문득 세상 생각을 잊어버려, 10년 홍진紅塵에 일만 일이 틀린 것 알겠구나. 어찌하면 이 몸도 얽맨 줄을 끊어버리고, 늙은 중 따라 연기와 안개에 취해볼까. 산 중은 산을 사랑해 세상을 나올 기약이 없고, 세속 선비도 다시 올 것 알지 못하는 일, 차마 바로 헤어지지 못해 두리번거리는데, 소나무 위에 지는 해 세 장대( 三장)기울었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글과 같이 화암사 가는 길은 마치 첩첩산중처럼 깊고도 적막하다.

폭포 사이로 난 철제 다리가 아니고, 옛사람들이 다니던 절에 가파른 길을 오르자 도착하자마자 다시 폭포가 나타나고, 조금 오르면 우화루에 이른다.

완주 화암사 목어. (사진=신정일)
완주 화암사 목어. (사진=신정일)

화암사 우화루(보물 662호)는 목조로 지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다포계 맞배지붕으로 누각형 식이다. 외부는 기둥을 세우고 안쪽은 마루를 깔았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있는 전면 기둥들은 이층이며 계곡을 바라보고 있는 후면은 축대를 쌓은 후 세운 공중 누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우화루는 건축형식으로 보아서 극락전을 세운 시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의 초창 된 것으로 추측되는 천 삼백여년의 세월을 견디어 온 옛 절 화암사는 창건자나 창건연대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이곳의 별장에 와 있을 때 용추龍湫에서 오색이 찬란한 용龍이 놀고 있었고, 그 옆에 서 있던 큰 바위 위에 무궁초가 환하게 피어 있었으므로 그 자리에 절을 지은 뒤 화암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원효와 의상대사가 이곳 화암사에서 수행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서 신라 진덕여왕 때 일교국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함께 문무왕 때나 그 이전에 창건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화암사 동쪽에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대”의 전설이 전하고 의상대사가 정진한 의상대는 불명산 정상에서 남쪽 아래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원효와 의상 이후 고려시대의 사찰 기록은 거의 없고, 조선 1425년 세종 7년에 전라관찰사 성달생(成達生)의 뜻에 따라 당시의 주지 해총(海聰)이 1429년까지 이 절을 4년간에 걸쳐 중창, 이 때 화암사가 대가람의 면모를 갖춘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 (사진=신정일)
완주 화암사 극락전. (사진=신정일)

이 절의 극락전極樂殿(보물 663호)은 중국 남조시대에 유행하던 하앙식下昻式 건축물로 지어진 우리나라에 유일의 목조 건축물이다. 그레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필수 답사처이기도 하다. 건물의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맛배지붕이고 중앙문은 네 짝으로 된 분합문이며 오른쪽과 왼쪽 문은 세 짝으로 된 분합문으로 되어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조선조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극락전은 남쪽을 향하여 지어져 있다. 1m 정도의 높은 기단위에 세웠고, 전면은 처마를 앞으로 길게 빼내기 위하여 하앙을 얹은 후 이중에 서까래를 가공한 것이다. 하앙이란 하앙부재를 지렛대와 같이 이용하여 외부처마를 일반 구조보다 훨씬 길게 내밀 수 있으며, 특히 건물의 높이를 올려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한 연유로 하앙식 건물은 비바람을 막아 주면서도 그 유연한 아름다움이 빼어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제나 가도 적막하고 고적한 절, 화암사의 우화루 계단을 내려 설 때 폭포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는지도 모른다. 

"가지 말아라."

가을에 다시 나는 화암사에 오리라. 불명산의 모든 나뭇잎들이 색색으로 물들었을 때 또는 더 늦어 그 잎새들이 한잎 두잎 떨어져 내릴 때 우화루에서 나무로 만든 여닫이 문을 열고서 옷깃 여민 채 흐르는 세월 속을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눈시울 적시며 바라보리라.​

-신정일(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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