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개암사.
부안 개암사.

[더리포트] 오천년 역사가 켜켜이 쌓아올린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 대대로 전승된 장인의 솜씨와 금수강산이 빚어낸 우리의 소중한 국가자산을 찾아보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동학농민혁명의 진원지인 고부의 진산 두승산에 올라서 보면 변산국립공원에 하늘에 떠 있는 섬처럼 우뚝 선 봉우리가 보인다. 개암사를 품고 있는 우금암이다.

부안군 상서면에 있는 개암사의 일주문을 지나서 전나무 숲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면 눈앞에 그림처럼 나타나는 절이 개암사다. 

<개암사지>에 의하면 개암사(開암寺)지는 변한의 왕궁 터였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성을 쌓았다. 문왕은 우禹와 진陳 두 장수를 보내 감독하게 하였으며, 좌우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지은 후 동쪽의 것은 묘암, 서쪽의 것은 개암이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그 뒤 백제 무왕 35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 짓고 개암사와 묘암사로 고쳐 불렀고, 통일 신라 문무왕 때 원효와 의상대사가 중창하였다. 고려 충숙왕 때 원감국사가 중창하였고, 조선 태종 때 선탄선사가 중수했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고 말았다.

지금의 대웅보전은 효종 9년에 밀영선사와 혜징선사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울금산성을 뒷 배경으로 지어진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다. 대웅보전 뒤편에 나 있는 산길을 올라가면 우금암遇金岩에 이르고 그 아래에 복신굴이 있는데, 복신은 백제의 장수였다.

백제의 멸망 이후 백제의 장군이었던 복신과 도침이 의자왕의 넷째 아들 풍豊 왕을 불러들여 백제 부흥운동을 벌렸지만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왕이 복신을 죽이는 지도부의 내분으로 백제군의 사기는 떨어지고 말았다. 나당 연합군이 663년 7월에 주류성을 공격해오자 지원하러 왔던 일본군이 신라 수군의 연화계連火計에 의해 패망하였고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백제의 패잔병들을 9월 7일 주류성이 함락되고 말자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써 다했다. 고향 땅을 어찌 다시 밟으리오.”라는 뼈아픈 탄식을 남긴 채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그 뒤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백제의 유민이었던 경상도 문경사람 견훤이 백제의 맥을 잇겠다고 전라도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건국했지만 결국 역사의 뒤틀림으로 패망하고 말았으니....

우금암 복신굴.
우금암 복신굴.
부안 우금암.
부안 우금암.

복신 굴 바로 옆 울금바위 아래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원효방이 있고, 고려 때 문장가인 이규보는 이 원효방을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이규보의 뒤를 이어서 조선시대의 문인화가인 강세황도 이곳을 찾은 뒤 <유우금암기>를 남겼다. 

”어깨에 메는 가마를 타고 올라가니 바위 아래에 굴이 있어 크기는 100칸의 집만 하고 깊이는 수십 장이나 된다. 벽의 무늬가 비단처럼 종횡으로 나 있어 마치 무늬 넣은 비단과 같다. 이곳이 우진굴[禹陳窟. 또는 우금굴(禹金窟)]이다. 굴 위에 옥천암(玉泉菴) 세 글자를 새긴 편액이 걸려있다. 굴 앞에는 작은 난초가 있는데 마치 굴을 둘러싼 듯하였다.“ 

강세황이 이곳을 답사 한 뒤 남긴 <우금암도>는 미국 LA 카운티미술관에서 이국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개암사, 내소사에 가려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 절의 스님들과 부안현의 아전들이 조선 시대의 기생이자 여류시인이었던 이매창의 시집을 편찬하였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움 꿈만 오락가락 하도다”

두고 떠난 정인 유희경을 위해서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남긴 이매창을 두고 시인 신석정은 유희경,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 삼절이라고 불렀는데, 허균까지 포함하여 부안 사절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아픈 역사와 옛사람들의 흔적이 켜켜이 서린 우금암 일대를 2020년에 문화재청에서 국가 명승으로 지정되었으니, 자랑스럽지 않은가?

-신정일(문화사학자.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우금암에서 본 개암사.
우금암에서 본 개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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