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문화는 물과 같아서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동아시아에서 문화의 수준이 가장 높았던 곳은 중국이었다. 그래서 중국의 선진 문화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어갔고, 일본은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언제나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통시대 일본이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규정했던 중국 중심의 ‘책봉-조공체제’ 속에 들어가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군사적 역학관계가 전도됐던 기점이었다. 군사력에서 조선을 압도했던 일본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 달라”는 이유를 내세우며 조선을 침략했고, 왜군은 부산에 침입한 지 이십 여일 만에 한양에 도착하여 조선의 도성을 짓밟았다. 환난에 처한 선조는 백성의 원망 속에 의주로 피난을 갔고, 조선의 관군은 왜군의 무력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조선도 그렇게 간단한 국가는 아니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바다에서 왜군의 진격을 차단하며 전세를 역전시키기 시작했고, 국가의 역할이 부재한 곳에서 민초들은 끊임없이 의병을 일으켰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를 추구했던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로 변모하며 주변 지역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대외팽창 정책을 펼쳤던 일본은 1874년 대만을 침공했으며, 1879년에는 류쿠(琉球) 왕국을 멸망시키고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였다. 1875년 운요호(雲揚號) 사건을 일으켜 조선 침략을 저울질했던 일본은 이듬해인 1876년 조선을 겁박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된 때는 1910년이지만, 통감부가 설치되고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 조선은 사실상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만35년의 일본 식민지 시기는 한국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남겼지만, 1965년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시켰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부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거친 이후인 1965년 양국은 관계를 ‘회복’했던 것이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1965년에 이뤄진 것은 기억해도 수교를 위한 한일 간의 교섭이 언제부터 어떻게 진행됐던 것인지를 알고 있는 대중은 그리 많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1951년 10월부터 1965년 6월까지 14년 동안 교섭을 되풀이 했는데, 양국의 수석대표가 참가한 공식회의만 7차례나 되었고, 한일 간의 비공식 접촉은 1500회 이상이었다. 

그런데 한일 간 수교협상이 1951년에 시작됐다는 사실로부터 두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교섭이 시작됐던 1951년 한국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국가존망의 위협에 처해 있던 때로서 일본과의 수교협상에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둘째, 한일 간 수교협상이 진행되기 이전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사죄의 입장 표명이나 움직임도 전혀 없었다. 결국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도 수교를 위한 상황과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던 상태에서 협상이 시작됐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수립하여 지역협력체제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른 결과였다. 

한국과 일본은 화해할 수 있을까? 한일관계 개선과 발전을 가로 막는 두 가지 장애물이 존재한다. 하나는 영토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문제다. 일본이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계속해서 주장하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작금의 인식을 견지하는 상황에서 한일 간의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해 보인다. 한일 양국의 신뢰와 국익이 어긋나고 충돌하는 상황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 발전을 원천적으로 제한시킨다. 하지만 화해는 불가능해도 공존은 가능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결국 한국과 일본은 궁극적인 공존의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현재 윤석열 정부가 밀어붙이는 한일관계 개선의 해법이 그러한 방향에 맞는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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