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흔히들 없다고 하지만, 필자는 역사의 ‘만약’이 매우 의미가 있고 또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대화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라면, 과거에 선택하지 못했거나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가정을 세워보는 것이 미래에 대한 방향 설정에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역사에서의 ‘만약’을 통해 현재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의 방향을 예측할 방법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에서 1946~1949년까지 벌어졌던 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이 승리했다면 어땠을까? 

우선 오늘날 동아시아 국제사회를 긴장으로 몰아넣고 있는 미중 간의 패권경쟁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미국과 중국(장제스 국민당 정권)은 연합군의 일원으로써 일본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고,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는 전후 동아시아 구상에서 중국의 장제스 정권을 지역질서 재편의 협력 파트너로 삼고자 하였다. 애초에 미국은 소련도 아시아에 끌어들여 전후 동아시아 국제질서 구축 과정에서 일정한 책임과 역할을 맡기고자 했다. 그러나 냉전이 확산하면서 소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굴절됐지만,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변함없이 추진됐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국공내전 기간 장제스 정권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대륙이 공산화될 때까지 진행됐다. 하지만 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이 패배하면서 미국의 전후 구상도 일그러졌다. 국공내전의 승리가 중국 공산당에는 중국혁명의 성공을 의미했지만, 미국에는 대륙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만약 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이 승리했다면 미국의 가장 강력한 동맹 파트너가 중국에 들어섰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은 미중 패권경쟁이 동아시아 지역을 긴장시키는 상황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만약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정권이 승리했다면, 일본은 과거사 문제에 대해 지금과는 달리 보다 전향적이고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는 국가가 됐을 것이다. 전후 일본과 독일이 보여준 과거 전범 문제에 대한 상반된 태도와 행보는 흔히 비교의 대상이 되곤 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 독일은 사죄와 반성의 모습을 보이지만 일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이 패배하면서 미국은 중국을 ‘상실’했고, 냉전이 동아시아 지역으로 확산하는 상황 속에서 시급히 새로운 협력 파트너를 선정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의 전후 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새로운 파트너로 낙점된 대상이 바로 전범국가 일본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사실상 일본의 죄상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단죄하는 자리가 아니었고, 현실적인 정치적 필요로 전범국가 일본을 정상적인 국가로 전환하기 위한 목적에서 개최된 회의였다. 게다가 한국전쟁 기간 중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담은 소련과 중국 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일원으로 함께 싸웠던 주요 사회주의 국가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진행됐던 반쪽짜리 회의였다. 

그래서 회의는 ‘전면강화(全面講和)’가 아닌 ‘편면강화(片面講和)’의 성격을 띠고 말았다.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통해 ‘신분세탁’을 거치며 전후 미국의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핵심적인 전략 파트너가 됐던 일본은 동시에 더는 과거의 잘못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국가로 변해갔다. 만약 국공내전에서 장제스 정권이 승리했다면, 현재 일본이 담당하는 미국의 동맹국 지위는 중국의 것이었을 테고, 일본이 지금처럼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불철저한 국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약 국공내전에서 중국국민당이 승리했다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중국혁명의 성공, 즉 대륙의 공산화는 한반도 적화통일에 대한 북한 정권의 열망을 크게 자극했다. 북한의 전쟁 도발은 중·소의 동의와 지원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만약 대륙이 공산화하지 않았다면, 북한의 김일성 정권은 북쪽의 장제스 정권과 남쪽의 이승만 정권이라는 두 자본주의 국가 사이에 마치 샌드위치처럼 끼인 상황에 처했을 것이고, 섣불리 전쟁 도발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동족상잔의 비극이 남긴 분노와 증오가 오늘날 남북 간 극단적인 적대심의 근저를 여전히 채우고 있다. 남북이 분단은 됐어도 서로를 학살했던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적개심에 사로잡혀 서로를 원수와 같이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배척하는 상황은 상당부분 누그러졌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냉전구조를 큰 틀에서 규정했던 것은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중국-대만의 양안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기본 구조를 이루고 있다. 탈냉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아시아인들에게 냉전이 남긴 구조가 여전히 현실적인 문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해결하지 못한 숙제를 안고 살아가는 아시아인들에게 과거에 선택하지 못했거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가정과 성찰이 미래에 대한 방향을 가늠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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