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중국연구원. 정혜영 학술연구교수.
건국대 중국연구원. 정혜영 학술연구교수.

◇ 변화하는 극(極)질서, 신(新)애치슨 라인

세계질서는 미·중 갈등과 맞물려 돌아가는 신(新)냉전(冷戰)의 돌입인가,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다극적 세계질서의 출현인가? 

국제정세를 보는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라 각기 다른 주장이 분분하지만, 기존의 세계질서를 흔드는 동인(動因)은 이미 시작된 ‘미·중 갈등’임은 분명하다. 즉, 세계질서 변화예측은 미·중 갈등의 맥락을 짚으면 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계 정세를 어떻게 읽고 어떤 미래를 대비할 것인가?’는 한 국가의 운명을 책임질 외교정책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중은 완전히 분리되기가 불가능므로 강대국 사이 균형을 추구하면 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맞지만, 미국이 도전하는 중국을 넘어트리기 전까지는 물밑에서 치열한 전쟁이 진행될 것이기 때문에 ‘신 냉전시대 회귀 질서에 맞는 외교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견해도 맞다. 작금의 국제질서를 어떠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정답은 ‘우리나라의 지정학이 어떠한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북한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육상국경을 두고 있다. 해상으로는 중국과 접해 있으면서도, 미국과는 오랜 동맹국이다. 미·중 갈등의 최극단 경계에 있다. 따라서 때로는 중국에 대한 균형도 필요하고, 동맹국 미국에 힘을 실어주는 편승도 필요하다. 이 세력균형의 요충지는 북한 요인으로 더욱 흔들릴 확률이 매우 높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당사국들은 전쟁이 지속할수록 자신들에게 우방이 되어줄 미국과 중국의 지원이 절실한 신(新) 열전(熱戰)을 치르고 있지만, 인도와 아세안 국가처럼 미·중 어느 하나를 뚜렷하게 선택할 필요가 없어서 애매한 포지션을 취하는 국가도 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로 밀려오는 열전의 기운은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 냉전 시기 미국은 애치슨 라인(Acheson line)을 설정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에 의해 발표된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동북아시아 극동방위선을 획정한 선언이었다. 1950년 1월 10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비밀회담에 참석한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극동방위선을 타이완 본토가 포함되지 않은 동쪽 바다 즉,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해양선’으로 언급한다. 

당시 미국 안보에 중요한 국가는 애치슨 라인 안쪽에 자리한 일본과 필리핀이었다. 베트남(인도차이나반도), 대만, 한반도는 애치슨 라인 밖에 존재한 것이다. 이때 북한 김일성은 이 애치슨 라인을 읽고 전쟁을 감행할 구상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애치슨 선언에 대해 즉각 반발했다. 미국의 국토방위권에 한국을 포함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문의 서안을 미국 국무부에 보냈지만,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웬 레티모어 교수의 보고서와 상원연설에서의 주장처럼, 그 시기 한국은 미국에서 원조와 군사 지원을 받아야 하는 짐이 되는 존재였다. 이러한 미국 정계의 분위기로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는 1949년 12월 공산군 무력 침입 시 남한에 지상군을 파견하지 않는 결정을 내린다. 그럼에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즉각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인 즉, 해양으로 남하하려는 중국·소련의 존재와 위협을 막는 일이 미국의 극동방위선 범위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은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이라는 2번의 전쟁을 치르고, 헨리 키신저의 구상에 따라 중국을 미국 편으로 온전히 끌어들인 다음에서야 소련을 무너트리는 승리를 얻는다.

오늘날에도 미국의 관심사는 자신의 반대편에서 부상하는 해양 세력이며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할 주요 수단으로 세력균형을 생각한다. 남하하는 중국을 막아야 하는 관점에서 본다면 미국의 신(新) 애치슨 라인은 일본-한반도-대만-베트남-인도가 포함된 인도-태평양 지역 방위선일 것이다. 이 라인에서 세력균형은 중국의 남하를 견제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바이든은 트럼프 정부가 그려낸 인도-태평양 구상을 전략으로 바꾸는 한편, 한-미-일 동맹강화라는 세력균형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한반도-대만-베트남 지역의 해양을 인도-태평양의 방위를 위한 미해군의 주요 작전지역으로 삼고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애치슨 라인은 분쟁 발생이 가능한 미국의 세력균형 라인이다.

◇ 민감해진 베트남의 지정학과 강대국의 요구 

다수 전문가가 우려했듯, 2023년 동북아는 ‘한·미·일’ 대 ‘북·중·러’ 구도가 전보다 뚜렷해졌다. 동북아에 신냉전의 기운이 드리우는 동안 미·중 갈등 경계부 국가 베트남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있었을까? 2023년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 두 강대국으로 인해 지정학적으로 민감해진 한 해를 보냈다. 미국과 중국은 베트남으로부터 자신에 힘을 실어줄 더 많은 것들을 얻고자 했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20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이후 3연임에 성공하고 2022년 10월 30일 중국을 공식 방문하는 첫 국가로 베트남을 선택한다. 베트남의 응우옌푸쫑 서기장은 이러한 초청에 응해 정치적 신뢰 관계를 과시했다. 베트남 공산당 권력 서열 1위인 응우옌푸쫑 서기장과 중국 공산당 권력 서열 1위 시진핑 주석은 모두 공통으로 기존의 당내 규칙을 깨고 3연임에 성공했다. 대외적으로는 ‘외교와 국방에 대한 최고 권력 발휘, 대내적으로는 보수화 및 강경화 기조 유지, 부패 척결 기치로 권력을 강화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중국에서의 베트남 정상 초청은 양당의 미래 방향과 발전을 지원하며 사회주의 노선을 함께 하는 운명 공동체로써 연대를 강화하고자 한 정치적 의미가 컸다. 중국에 베트남의 존재는 중국 국가 존립과 정체성을 확인하는 우군의 존재를 전 세계에 고하는 의미였다. 이후 2023년 중국의 남중국해 갈등은 베트남보다는 필리핀을 중심으로 확대한 양상을 보였다. 

2023년 초 공석이었던 베트남 국가주석에 신임 보반트엉 주석이 취임(3월2일)하자, 2023년 3월 22일 미국은, 미국 기업 52개사 대표로 구성된 대규모 미 경제사절단을 베트남으로 보낸다. 경제적으로 지원 협력이 가능한 분야에 대한 기업 차원의 구체적인 타당성 조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어 4월 14일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은 베트남과 일본을 동시 방문했는데,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공동 비전을 논의하고 베트남 내 미대사관 신축 기공식에 참석한다. 6월 28일에는 베트남 공산당 대외관계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7월 20일 옐런 재무장관이 하노이를 방문, 전기오토바이를 시승하고 친환경에너지 사업 지원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진다. 2023년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9월 10일 방문으로 마무리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응웬 푸 쫑 베트남 공산당 총서기장과 정상회담을 통해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라는 양국 관계 격상을 끌어낸다. 

미국 주요 인사들의 베트남 방문이 이어지는 동안 중국은 6년 만에 이루어지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이례적인 베트남 방문을 준비했다. 시진핑 주석은 2023년 12월 마지막까지 베트남의 손을 놓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 이루어지지 못한 일대일로 완성을 위해 중국은 광시좡족자치구에서 하노이에 이르는 철도건설 업그레이드 제안을 위한 준비와 양국 간 기타 국경철도 건설을 가속하는 데 도움을 줄 협력에 대해 구체적인 검토를 했다.

2023년 12월 12일 이루어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베트남을 국빈 방문에서는 인프라 협력, 국유기업 개혁, 광물 분야 협력, 친환경 에너지 사업 등의 내용이 포함된 36개 문서에 대한 양해각서(MOU)가 체결된다. 2023년 한 해 미국과 중국에서 베트남과 관계 강화를 위해 논의된 분야는 베트남이 고군분투하는 남중국해 지원과 관계된 군사 분야가 아니었다. 미국과 중국의 접근 방식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경제지원 협력 카드였다. 

◇ 베트남 대나무 외교의 현실과 실제

2023년 12월, 필자가 참여한 한 국제학술회의에서 베트남 전문가는 남중국해에서 남하하고자 하는 중국의 노골적인 노력(일명: ‘회색지대 전략’)으로 일본과 베트남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고 있다고 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점점 심화하는 양상에 따라 남중국해의 불안정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피부로 느끼고 있는 베트남으로서는 ‘한-미-일’ 동맹 강화 기조가 더욱 든든하게 느껴진다고 전했다. 날로 증진되는 중국의 해양군사력강화 측면에서 보자면 베트남은 해양에서 협력할 우군이 절실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의 베트남 안보 기조는 국방력에 의지하기보다는 외교정책과 부국강병에 의한 ‘위험회피’ 외교에 방점이 찍혀왔다. 베트남의 2019국방백서에는 ‘4 Nos’ 원칙이 분명하게 천명돼 있다. 즉 ‘어느 국가와도 동맹관계를 맺지 않고, 다른 공산당과 적대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며 베트남 내 타 국가의 해외군사기지를 허용하지 않으며 타 국가와 관계에 있어 군사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2024년에도 양 강대국 사이에 있을 베트남의 지정학은 변하지 않는다. ‘강대국 결정론’에 따른 국제정치에 휩쓸리지 않고, 대나무 뿌리를 단단하게 고정하는 베트남의 외교가 한국에도 의미를 던져주는 새해이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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