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아주대 사학과 한상준 교수. 국제학부 중국지역 전공 담당. 

한미동맹과 분단국가 한국의 외교적 선택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재론의 여지없이 중요하다. 대륙과 해양의 접점에 위치한 한반도는 교류와 소통의 중심축인 동시에 대립과 충돌의 화약고이기도 하다. 그것은 평화와 안정의 시기 한반도가 번영과 성장의 허브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또한 격변과 혼란의 상황에 직면해서는 외부 세력 간 이익과 갈등이 첨예하게 맞부딪친 전장(戰場)이기도 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여실히 증명된다. 주목해야 할 명백한 사실은 한반도 내부와 주변 정세의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한반도 둘러싼 힘의 균형이 깨질 때마다 한반도는 위기에 직면하곤 했다는 점이다.

분단된 반도국가

한반도에 위치한 한국은 당연히 반도국가로 규정되지만, 사실 한국은 엄밀한 의미에서 반도국가는 아니다. 한국이 한반도에 위치한 것은 맞지만, 반도국가의 정의에 부합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한국은 충족시키지 못한다. 반도(半島)라 함은 절반만이 섬이어야 하는데, 곧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이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지만, 한국의 조건과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것은 맞지만, 한반도 북부를 차지한 북한의 존재로 인하여 아시아 대륙으로 향하는 통로가 한 치의 틈도 없이 막혀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입장에서 한반도 북쪽 절반은 육지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단절된 ‘회색지대’일 뿐이고, 따라서 한국은 반도국가도 아니고 섬도 아닌 ‘기형적인’ 상태에 처한 국가인 셈이다. 북쪽이 대륙으로 연결되어 있으나 소통과 교류가 불가능한 상황과 조건 속에 갇힌 한국은 국제적·외교적으로 사실상 ‘고립’되어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과 환경이 이처럼 뒤틀려버린 것은 당연히 한반도 분단체제로부터 기인한다. 북한과 적대적 대치관계 속에 놓인 한국은 북한으로부터 제기되는 안보위협에 항시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북한이 핵까지 보유하면서 오늘날 한반도의 안보적 위기는 한층 더 고조된 상황이다. 그로 인한 군사적 긴장, 사회·정치적 불안, 전쟁의 공포는 고스란히 한국의 몫이 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이 반도 국가로서의 장점을 활용하지 못하는 수준을 넘어서 한국의 국가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엄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분단된 반도국가 한국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냉철한 자각이 필요하며, 말하자면 그렇듯 상수와 같이 정해진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과 환경에 대한 인식과 통찰로부터 한국외교는 해법을 찾아야만 한다.

2. 폐허에서 피어난 꽃

일본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겪지 않았다면, 혹은 일제 식민지 지배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한반도 해방이 미국과 소련에 의한 남북 분할 점령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다면, 한국은 분단국가라는 질곡에 빠지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는 진부한 사고에 매몰되기 보다는 한국의 현재와 미래를 설계하고 개척하는 반성적 성찰로서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해방의 과정에서 편의적으로 ‘가볍게’ 그어진 38선은 남과 북의 분단을 현실화하는 견고한 장벽으로 차츰 고착되어 갔다. 이념과 체제의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혼란과 대립 속에서 남과 북은 단독정부를 수립하였고, 분단은 한반도의 현실이 되었다. 남한이 먼저 정부를 수립했지만 한반도 분단의 책임을 전적으로 이승만 정부에 돌릴 수는 없다. 북쪽의 김일성 정권도 남쪽과 동일한 수준에서 해방 직후부터 ‘건국’을 치밀하게 준비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비극적인 일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감안할 때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인한 한반도 분단의 현실화는 필연적 수순이었고,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 한반도 전체를 관할하는 통일정부를 향한 남북의 무력 충돌 가능성도 점차 고조되었다.

결국 북한의 남한에 대한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은 한반도 전체에 천문학적인 인적·물적 피해를 입히면서 남북한 모두를 재앙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국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말 그대로 ‘폐허’로 만들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1950년대 한국의 정치적 혼돈은 극에 달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가 1950년대 한국의 상황을 평가한 것으로 알려진 이 문구는 한국의 절망적인 상황을 적나라하게 일갈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한국은 보란 듯이 폐허 위에서 꽃을 피워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 중에서 오늘날 선진국 반열에 올라선 나라는,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 방면에서 모두 성과를 달성하면서 글로벌 선도국가로서의 위상을 확립한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그야말로 한국은 폐허 속에서 꽃을 피워냈던 것이다.

3. 한미동맹의 시작과 이승만

식민지에서 벗어난 최빈국 한국이 전쟁의 폐허와 분단국가라는 질곡을 딛고서 오늘날 글로벌 선도국가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배경과 원인은 다양한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것을 국제적·대외관계사적 시각에서 살펴본다면 단연 한미동맹에 주목해야 한다. 1950년대 이래 한미는 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주의, 그리고 자유와 인권 등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유와 지향을 기반으로 견고한 동맹관계를 형성·유지·발전시켜 왔고, 특히 한반도 정세의 안정과 한국의 국가안보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 한미 군사동맹은 한국의 국가 발전에 확고한 버팀목이 되었다.

2023년은 한국과 미국이 동맹관계를 형성한지 70주년을 맞는 해다. 70년 전인 1953년 한미 양국이 체결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한미 간의 동맹관계가 본격적으로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미국과의 동맹관계 구축을 위한 한국의 외교적 노력과 성과는 이승만 정권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그런데 한미동맹관계 형성을 위한 미국과의 협상에서 주도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은 바로 이승만 본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곧 국부로서 추앙하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부정선거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훼손하여 결국 국민에 의해 추방당한 독재자라고 비판한다. 비록 국내 정치 분야에서 이승만에게 분명 높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이승만을 지지하던 혹은 반대하던 간에 그가 철저하고 확고한 ‘반공주의자’이자 ‘반일주의자’이며 동시에 ‘친미주의자’였다는 사실과, 국제정세 흐름에 대한 판독 능력이 뛰어나고 외교적 감각과 능력이 탁월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한국 외교가 이승만으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미국과의 동맹관계 수립 과정에서 보여준 협상 능력, 한국의 시각에서 국제정세 동향을 분석했던 안목, 그리고 미국을 상대하는 태도와 방식이다.

만약 미국이 유엔의 깃발을 들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이승만 정부는 북한 정권에 의해 전복됐을 것이다. 그만큼 당시 미국과의 동맹관계 수립은 한국의 국가적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고, 이승만은 자신과 정권은 물론 국가의 운명을 걸고 미국과의 동맹관계 체결에 전력을 다하였다. 한미동맹조약 체결과 그로 인한 한미동맹의 완성이 한국의 생존과 번영, 즉 국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과의 동맹 결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설득, 회유, 압박 등 가용한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된 이후 이승만은 미국이 공산주의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안보조약을 필리핀(1951년 8월), 일본(1951년 9월),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1951년 9월)와 체결했던 것에 주목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휴전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다. 특히 미일안보조약의 체결은 일본의 전통적인 팽창주의적 위협에 대한 이승만의 우려와 경각심을 더욱 강화시켰는데, 이승만은 한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존재로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과 더불어 군국주의 일본의 팽창에 대한 경계도 늦추지 않았다. 정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이승만은 단독 북진 강행도 불사하겠다면서 미국을 압박하였고,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한 미국의 결단을 압박하기 위하여 1953년 6월 18일 2만 5,000여 명에 달하는 반공포로를 자신의 직권으로 석방시키는 ‘벼랑 끝 승부수’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한미는 1953년 8월 8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한 후, 10월 1일 워싱턴에서 이 조약을 공식적으로 조인하였고, 1954년 1월 15일 한국 국회가, 1월 26일 미국 상원이 비준하였다. 이후 한국군 증강문제에 관한 한미 간의 대립으로 인해 비준서 교환이 연기되었다가 1954년 11월 17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정식으로 발효되었다.

4.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이승만의 집념과 의지는 “국익을 넘어서는 동맹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만은 ‘친미(親美)주의자’라기 보다는 미국을 활용하여 한국의 국익을 최우선적으로 확보하는 ‘용미(用美)주의자’였다고 해야 한다. 미국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한국을 미국의 영향권 안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고자 했지만 미국이 주도하는 판세에 무조건 끌려가지도 않았고,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의 아시아 전략에 근거하여 미일관계를 강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도 이승만은 맹목적인 한일관계 개선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이승만의 외교정책 수립의 중심에는 동맹국 미국이 아닌 한국의 국익이 최우선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해 ‘비상계획’과 ‘상시대비계획(Plan Everready)’을 수립했을 정도로 한미 간에는 갈등과 긴장도 고조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한미는 가장 모범적인 동맹관계를 형성시킬 수 있었다.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는 어디일까? 핵을 보유하고 있는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국가 한국에게 가장 중요한 나라는 미국이다. 따라서 한국 외교정책과 대외관계의 기본은 한미동맹관계의 토대로부터 구상하고 실행할 수밖에 없다. 지난 70년 간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한 한국의 성장이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그렇다고 미국 이외에 다른 국가는 한국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장구한 역사의 긴 호흡과 흐름 속에서 살펴봤을 때 한국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국가는 중국이다. 게다가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은 과거의 일로 끝난 것이 아니고 현재에도 유효하고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실 양자택일적인 외교 선택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 한국이 처한 외교안보 상황에서는 맞지 않는다. 외교가 중요하지 않은 국가는 없겠지만, 한국의 경우 특히 외교가 중요하며, 냉혹한 현실주의적인 측면에서 한국에게 중요하지 않은 나라는 없다. 한국과 긴밀하고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주요 강대국인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우리에게는 모두 중요하다. 미국과 중국이 세계를 분할하려고 하는 G2 시대의 국제적 환경은 혼란과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미중 간의 세력 경쟁도 날로 첨예화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기존의 양극질서를 넘어서는 다극화된 국제질서 체제가 구축되고 있다는 움직임에도 주목해야 한다.

5. 한국 외교의 선택

따라서 여러 선택지 중에서 하나만 선택하는 ‘일변도 대외정책’은 한국외교 영역에서 가장 하수(下手)에 해당하며, 오히려 한국은 정책적 노력을 통해 양자택일이나 일변도적 상황이 조성되는 형국을 최대한 피하고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 지점에서 한국의 국력과 국제적 위상 및 영향력에 대한 우리 스스로의 냉혹하고 정확한 성찰과 인식의 기반 위에서 한국의 외교안보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요구된다.

오늘날의 한국은 예전과 같은 약소국이 이미 아니며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과거와는 다르다. 한국은 군사력 세계 6위의 군사강국이다. 지난 2018년 국민총소득(GNI) 3만 달러를 돌파했고, 2022년 세계 수출시장 점유율에서 6위를 차지했다. OECD에 따르면 2021년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전 세계 2위로 한국은 혁신역량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2020년 기준 한국의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18.4%로 미국(50.8%)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했다. 2022년 미국 US News & World Report와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글로벌 국력 순위’ 인식 조사에서 한국은 6위에 선정되었다. 한국의 K-문화가 전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도 막강하다.

한국은 자신감과 저력을 바탕으로 우리의 국력에 걸맞은 자주성 있는 외교정책을 추진해야 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표현처럼, “좁은 도랑에 들어간 소가 오른쪽 둑의 풀을 뜯어 먹고 왼쪽 둑의 풀도 뜯어 먹으면서 유유히 자기 길을 가듯이 한국은 미국과의 관계도 잘 관리하고 중국과의 관계도 잘 관리해야 한다.”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강화시킨다고 해서 한국과 중국 간의 관계가 멀어지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상황을 한국이 만들어서도 안 된다. 요컨대 분단국가 한국은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하며, 한국의 국력과 위상에 부합하는 자주적인 외교정책을 자신감 있게 펼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익 보다 앞서는 동맹은 없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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