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광고PD/다큐멘터리 제작자/연극 연출가 김한석
문학박사/광고PD/다큐멘터리 제작자/연극 연출가 김한석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화양연화’라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제목이 보이는 순간, 엔딩 크래딧이 올라갈 때 느꼈던 심장의 저릿함이 다시 찾아왔을 것이다. 성별 지향(志向)의 차이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어떤가? 아마 매끄럽게 표현하기 힘든 먹먹함이 느껴졌을 것이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지만 -니체의 표현대로 라면- 결혼제도 때문에 타락된 개념이 된 내연의 로맨스다. 

요즘 오피스 스파우즈(Office spouse)라는 관계가 낯설지 않다고 한다. 실제 부부나 애인 관계는 아니지만, 직장에서 배우자만큼, 때로는 배우자보다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이성 동료를 일컫는 관계로써 여성은 오피스 와이프, 남성은 오피스 허즈번드라고 불린다. BBC가 선정한 ‘21세기 최고의 TV 시리즈 톱 100’ 2위에 올랐으며 1960년대 미국 뉴욕의 광고계 비하인드 스토리와 당시 시대상을 다루었던 드라마 매드맨(Mad Men)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했던 것을 보면 한국보다 일찍 여성의 사회 진출이 시작되고 오피스 문화가 먼저 형성된 서구에서는 오래전부터 보편적인 현상인 듯하다. 

한국의 광고계에서도 굳이 대놓고 물어보지는 않지만, 오피스 스파우즈 관계들이 눈에 띌 때가 있다. 광고인들은 보통 일터에서 지내는 평균 시간이 하루 10시간 이상으로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의 두 배를 넘는다. 이렇다 보니 가족은 하루에 출근 전이나 퇴근 후 잠깐 보고 주말에도 출근하거나 집에 있더라도 대부분 피곤해서 종일 잠만 자거나 최소한의 활동만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가정의 배우자와는 점점 공통의 관심사 혹은 대화시간이 줄어드는 반면 직장에서 이성 동료와는 하루 대부분을 함께하며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시간도 많다 보니 대화가 잘 통하고 서로 감정이 싹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국내외 출장, 외근, 야근, 회식, 식사를 항상 함께하며 공식적인 일정 이외의 시간도 공유하게 된다. 이러한 관계가 업무에 팀웍 향상과 효율성, 도전정신으로만 쭉 이어지면 좋으련만 이들 간 업무적 마찰을 일으키거나 적극적인 사적(私的) 감정의 개입이 표출되면 주변 구성원들이 매우 피곤하게 되는 부작용이 발생하게 된다. 광고 기획파트에 엄청난 자부심을 가진 여성 간부가 있었다. 자신의 가문, 능력, 인적 네트워크, 심지어는 어색한 미모(?)까지 입만 열면 자기 자랑과 홍보로 혀에 피가 날 정도였다. 이런 종류들 특유의 처세술인 잘 보여야 할 사람과 무시해도 될 사람들에 대한 구분과 행동이 너무 뚜렷해서 어떤 이는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는 것이 낫다며 동석을 피하기도 했다.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한 토막은 자신의 애로사항을 개선하기 위해 회식 자리에서 경영자의 한쪽 팔을 휘감고 가슴을 밀착시킨 후 어리광을 더해 앙탈을 부렸고, 경영자는 입이 찢어져라 미소 짓고 있던 모습이다. 이에 반해, 굉장히 소심하고 내향적이며 존재감 없는 제작 파트의 간부가 있었다. 평범한 능력에 사적 영역도 크게 내세울 게 없는지라 그저 조용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자부심녀의 입에서 소심남의 이야기가 언급됐는데 그녀는 “그 사람은 제작팀보다는 일반 사무직으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어요?”라며 그가 ‘프로’로서는 얼마나 실력 없어 보이는지를 굳이 각인시키려 했다. 

그런데 무슨 계기가 있었는지 어느 날부터 두 사람이 붙어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더니 그녀의 입에서 그에 대한 칭찬이 시작됐다. 더 나아가 윗사람들에게 입김을 불어댈 줄 알았던 그녀가 자신의 기획팀 담당 제작팀으로 소심남 팀을 지명해 결재받은 것이었다. 담당팀이 됐으니 그 후로는 기존 광고주와 관련한 회의와 신규 광고주 개발을 위한 경쟁 프레젠테이션 회의까지 얹어 잠자는 시간 말고는 꼭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보통 회의는 다 같이 하더라도 식사는 각 분야의 팀원끼리하곤 했는데 이들은 식사도 업무 회식 2차에도 둘만 따로 했다. 심지어 광고주 출입도 때때로 둘만 출입해 가며 암수 서로 정다웠었다. 

이들의 관계는 둘만의 추억 쌓기를 넘어서 제작팀원들에게 큰 상처를 입혔는데 자부심녀는 광고주 의견이라는 핑계를 대며 제작팀원들의 의견을 무시했고 잦은 수정과 말 뒤집기로 남의 자존심을 마구 짓밟아 댔다. 더 어이없는 상황은 제작팀원들이 그녀의 망동을 소심남에게 호소하면 소심남은 늘 그녀의 뜻대로 해주라는 말만 반복했던 것이었다. 그날 야근 후 상처받은 팀원들끼리 소주잔을 기울이며 다독이다 황당의 결정판을 듣게 되었는데 동석한 동료로부터 그들이 신규 광고주 개발을 핑계로 회사에 단기간 호텔에서 기획 작업을 신청, 두 사람만 호텔에 출입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직후 모든 팀원은 그들을 포기했고 얼마 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시간이 흘러 어쩌다 그 두 사람과 마주치기도 하고 소식을 듣기도 했는데 내용은 썩 좋지 못했다. 특히 자부심녀가 소심남 외에도 다른 남성 동료들과 선정적인 행태를 함께 했다는 등의 얘기를 들었을 때, 마음속에서 귀를 세척해야 했다. 니체는 이렇게 표현했다. ‘자신의 사랑이 습격해 오는 것을 경계하라! 고독한 사람일수록 앞에 있는 아무에게나 빨리 손을 내민다.’ 이 시대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한 지적 능력을 요구하며 떠나는 날까지 무한 경쟁에 몰리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고독하다. 고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손 내밀 곳은 결국엔 집이다. 오피스가 아니다.

저작권자 © 더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