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광고PD/다큐멘터리 제작자/연극 연출가 김한석
문학박사/광고PD/다큐멘터리 제작자/연극 연출가 김한석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고 이병철 삼성그룹 전 회장의 인재발탁 철학으로 ‘사람을 의심하면 쓰지 말고,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는 뜻이다. 업(業)의 포지션이 고용주이자 피고용인을 동시에 넘나들며 양측의 입장을 체험하는 현장에 있다 보니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음에 새겼던 문구다. 

며칠 전에 모 광고주가 본인을 지명하며 광고제작을 맡기라고 광고대행사에 의뢰해 첫 회의를 했다. 본인이 건넨 명함을 대충 받으며 쩍 벌린 자세에 거친 표정과 말투로 본인과 작업이 탐탁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그들은 신입사원 면접하듯 경력과 포트폴리오를 꼬치꼬치 물었다. 그리고 꼬치꼬치 질문은 본인의 스태프들에 관한 답변 요구로 이어졌다. ‘내가 너희 상무보다도 선배입니다’라며 튀어나오려는 꼰대질을 억눌렀다. 

이미 방문 전 회사소개서와 포트폴리오 동영상 파일을 전달했으나 안 본 건지 보고도 이러는 건지 의아했지만, 자신들의 지인을 이번 광고제작에 쓰지 못하는 아픔(?)의 표현이라고 널리 헤아려주기로 했다. 회의 중에 작업하는 직종이 많이 나열된다 싶어 사무실로 돌아와 새삼 그들이 되새겨준 프로덕션 스태프들의 직종을 꼽아 봤다. 카피라이터 기획실장, 콘티 작가, 로케이션매니저, 모델 에이전시, 촬영감독, 조명감독, 아트디렉터,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 케이터링(밥차), 각종 차량 운전, 기자재 관련, 성우, 녹음 실장, 편집실장, 2D, 3D 실장 등 굵직하게 나열해서 이 정도이지 이들을 보조해 주는 인력들과 필요에 따른 세부 직종까지 나열하면 직종만으로 지면을 꽉 채울 듯싶다. 

태어나면서부터 서로 인연이 된 사이가 없듯 모든 스태프는 업계에 몸담으며 알음알음 알게 대 이어오고 있는데 본인이 이들에게 비용을 낸다고 해서 그들에게 베풀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실마리가 풀리지 않을 때 ‘툭’ 팁을 던져주기도 하고, 초치기 일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 누적된 피로를 감추며 힘을 보태기도 하며 갑들의 무리한 요구에 본인의 감정조절이 흔들릴 때 오히려 그들이 나서서 다독여 주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초과근무에 따른 오버차지(Overcharge)를 양해해 주기도 하고 견적의 네고(Negotiation)에 유연성까지 갖추는 등 본인과 갑의 거래가 지속할 수 있게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은근한 지원을 해준다. 

덕분에 갑들과 회의에서 그들의 용병술(?)인지도 모를 본인의 능력을 의심하는 언사와 함께 난도 있는 내용이 논의되면 일단 할 수 있다고 질러 버리고 맡고 볼 때가 있다. 역시나 우리 스태프들에게 맡아 온 내용을 전달하며 들어야 하는 징징거림과 눈에서 발사되는 광선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보란 듯이 해내는 그들이 있기에 갑들의 의심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듯하다. 스태프들은 말한다. “저희는 PD님 바라보고 해드리는 건데 광고주나 광고대행사는 말도 안 되는 견적, 빠듯한 일정이 주어져도 당연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사실 그랬다. 현장에서 만난 광고주나 광고대행사 관계자들은 그 당시만 모면하려고 할 뿐 험난한 과정이 지나고 좋은 결과로 마무리되면 애써 망각하려고 했다. 자신들의 머리숱에 불이 붙고 도끼에 발등이 찍혔을 때 늘어놓았던 약속과 장담은 풍선에 가득 담아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렸다. 본인 또한 광고주와 광고대행사의 입장으로 근무해 보았기에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배우가 얼굴에 손을 대지 않고 순식간에 표정을 휙휙 바꾸는 중국 가면술인 변검처럼 태도를 바꿀 때마다 밀려오는 실망감은 너무나도 컸다. 

창작의 고통,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 스태프의 구성이 거의 같고 국내, 해외에선 권위 있는 시상식도 존재하지만, 예술의 장르로 인정받지 못하는 분야, 이 분야에서 버티며 미디어의 혁명적인 변화를 함께 바라보고 있는 그들에게 각자가 숨겨 놓았던 자부심을 꺼내어 힘내어 보자고 하기에는 서로의 연차가 너무 쌓여 버렸다. 게다가 획기적인 마케팅 전략을 이유로 간단한 명령어만 입력하면 고화질의 동영상을 제작하는 인공지능(AI) 시스템의 등장으로, 몇 년 뒤 각자의 생업이 어떻게 바뀔지 모를 상황과 마주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를 강조하고 ‘다음’을 기약한 들 본인과 그들의 마음에 어찌 울림이 있을까? 오히려 갑의 허언 때문에 울분에 찬 누군가가 갑에게 찾아가서 영화 ‘달콤한 인생’ 이병헌의 명대사 그대로 “대체 나한테 왜 그랬어요?”라고 따지며 멱살이라도 잡을까 봐 불안불안할 때가 있다. 그렇기에 뿌리 깊은 불신이 조금씩이라도 개선되려면 동종 업계의 동업자 정신으로 갑의 솔직하고 겸손한 태도와 스태프들의 이해와 아량이 필요하다. 

이 바닥에 공무원처럼 정년 보장받고 차곡차곡 계획 세워가며 살아가는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은가. 직종을 가리지 않고 업계에 환멸을 느꼈다며 욱해서 떠난 이가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고 연로(年老)한 분들이 ‘늙으면 죽어야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 바닥에서 곧 떠난다’면서 환갑 가까이 맴도는 경우도 많은 것이 우리의 업계다. 사용자의 입장이기도 한 본인은 얼마 전 대형 유통매장 코스트코의 창업자 짐 시네갈의 스토리를 흥미롭게 보았다. 그는 ‘우리는 직원으로 사는 삶이 어땠는지를 기억한다’, ‘직원이 행복하면 직원이 최고의 홍보대사가 된다’라는 말을 남겼다. 스태프들이 직원은 아니지만, 현재의 나를 유지해 주는 그들을 기억하며 매사에 감사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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