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테오>, 830년경, 에페르네 시립도서관(큰 사진), <성 마테오>, 800년경, 빈 미술사 박물관(작은 사진). 제공 예경.

[더 리포트] 인류는 오래전부터 생각을 그림이나 조각, 건축, 음악 같은 갖가지 예술의 형태로 드러냈다.

이중 그림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셀 수 없는 그림들을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는 석학 E. H.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의 단순한 통찰에 있다. 그는 <서양미술사>(예경. 2003)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과 다르려는 점을 평가하는 것이 과거의 예술에 접근하는 가장 쉬운 길이다.”

곰브리치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모차르트 사례를 들었다. 소년 시절 모차르트는 파리에 도착한 뒤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파리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교향곡들이 모두 빠른 템포로 피날레를 장식해요. 저는 제 교향곡 마지막 악장을 느린 도입부로 시작하여 관중을 놀라게 할 거예요.’

모차르트는 당시의 음악 트렌드와 다른 방식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고 썼다.

사실, 이것이 창의력을 키우는 간단한 방법이다. 남을 놀래주는 일로부터 꾀가 생기고 생각이 깊어지고, 발상이 새로워지지 않는가.

예술과 과학 활동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글을 쓰고, 생물학자가 자연을 탐구하며, 수학자가 이론을 발표하고 화가나 음악가가 캔버스나 오선지와 싸우는 행위도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똑같다.(예외는 있겠지만)

남을 놀라게 한다는 뜻은 곧 남과 다르겠다는 점, 즉 차별화다. 이전 작품과 차별화 하려는 노력이 바로 예술의 역사요, 창의성의 역사다. 600여 쪽이 넘는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다음 두 대목이다.

한 필경사가 성경 속의 삽화를 그리고 있는 그림이 두 장(기사 맨 앞) 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에 성경 필사는 필경사 몫이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성 마태오다. 두 그림은 전체적인 구도나, 앉은 자세가 매우 흡사한데 책 위에 발을 올려놓은 점도 같다.

하나는 800년 경(작은 사진)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830년 경 그림이다. 우측 그림은 조용하고 경건하게 하나님 말씀을 적고 있다. 반면에 좌쪽 그림은 상당히 복잡하고 긴장감이 흐른다. 진지하게 뭔가에 골몰하는 상태로 보인다. 이는 동그랗게 뜬 필경사의 눈에서 알 수 있다.

인물만이 아니다. 아주 작은 오리 떼가 뒤뚱뒤뚱 걷고 있는 듯한 머리며, 스파게티 면발 같은 옷 주름, 그리고 숱한 사선이 그어진 산비탈이 이 그림의 특이함을 말해준다.

더 자세히 보면, 언덕위에 서 있는 나무와 풀까지 예사롭지 않다. 이는 화가의 심리이자, 필사자의 마음이다. 즉 화가는 하나님 말씀에 놀라움을 느낀 필경사의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그(화가)는 자신의 경외감과 감동 같은 것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며 “이것은 미술의 역사상 지극히 중요하고 가장 감격적인 사건“이라고 평했다.

조토, <그리스도를 애도함Lamentation>(1305년경). <그리스도를 애도함>의 부분화. 천사의 얼굴(왼쪽 사진 우측에서 두 번째 위쪽 천사 모습을 확대한 것)

차별화를 시도한 또 한명의 화가는 이탈리아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 1267~1337)다. 조토는 미술사에서 매우 특별한 인물이다. 그에 대한 평가는 “조토에 의해 미술이 다시 태어났다.“는 한 문장이 말해준다.

조토가 완전히 새로운 미술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딴 생각’ 때문이다. 그는 중세의 회화 양식이 너무 평면적이고 생동감이 없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모든 면에서 앞선 화가들과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그리스도를 애도함>은 똑같은 주제의 이전 그림들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혁신적이다. (당시 비슷한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은 박제된 새처럼 죽어있다.)

조토의 그림 속 여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슬픔이 뚝뚝 묻어난다. 이 그림은 워낙 유명해서 이런 평이 새삼스럽다. 그런데 그보다 더 안타까운 표정은 천사 얼굴에 있다. 특히 왼쪽 맨 아래 천사와 오른쪽 맨 위 천사가 그렇다. 

확대를 해서 자세히 보니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그 천사의 얼굴은 비통하기 짝이 없다. 맞잡은 두 손은 낙심한 마음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일그러진 눈과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질 듯하다. 그 시대에 그런 표정을 넣는 일은 말그대로 생각의 혁신이었다!

이전의 그림과 전혀 다르게 그리겠다, 그 마음이 조토를 위대한 화가로 만들었다. 왕실과 귀족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한 모차르트 경우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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