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폭포 (신정일)
부안폭포 (신정일)

나라 안에 내외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 여러 곳이 있다.

대개 명산에 그런 이름이 많다. 내외설악, 내외금강, 내외속리 내속리라고 부르는데 그 중의 한 곳이 바로 내외 변산이다.

변산은 바깥에다가 산을 세우고 안을 비운 형국으로 그래서 해안선을 따라 98Km에 이르는 코스를 바깥 변산이라고 하고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한 때는 사찰과 암자만을 상대로 여는 중장이 섰다던 안 변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내변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변산에서 지서리를 지나 중계리 사자동에 이르는 길이 그 하나고, 구암리 고인돌이 있는 하서면 석상리에서 우술재를 지나 사자동에 이르는 길이다.

청림리에서 사자동으로 이르는 길은 부안호를 따라가는 길이고, 4km쯤 가자 변산면 중계리 사자동이다.

이곳 사자동에서 직소폭포를 지나 관음봉 아래로 해서 내소사로 가는 길이 산책을 하는 것처럼 넘을 수 있는 도보 답사 길로 최상의 코스이다.

매표소를 지나면서 길은 평탄하고 조금 오르자 실상사 터에 닿는다.

실상사는 신문왕 9년(689년) 초의선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조선 제 4 대 임금인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의 원당이 되어 궁궐의 재물로 중수한 절이지만 한국전쟁 때 화재로 모두 불타버리고 그 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다가 다시 세웠다.

3기의 석조부도와 허튼 돌로 막 싼 기단만 남아 있는 절터는 이름 모를 뭇 새들의 울음소리 속에 붉은 단풍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늦가을 햇살에 온 몸을 드러낸 저 금당 터에 내소사 대웅전이나 개암사 대웅전 같은 날아갈 듯한 절 집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내소사에 소재 해 있는 연재루는 이 실상사에서 1924년에 옮겨갔다는데…

한편 이곳 실상사에서 월명암으로 가는 고개를 남옛등이라고 부른다.

조선후기에 문신이며, 을사오적 중의 한사람인 이완용李完用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 남여를 타고 월명암까지 가는데 고개가 가팔라서 힘들었으므로 남여등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문득 어디선 듯 독경소리 들리는 듯싶어 귀 기울이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계단을 내려설 때 뒤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소리, 길을 재촉하자 호수에 이르고 그 물결이 찰랑거리는 바로 뒤쪽으로 길이 나 있다. 잔잔한 물결 너머의 산들은 붉게 타오르고 산행객들이 쉴 새 없이 오고 간다.

한참을 올라가자 발 아래 보이는 곳이 봉래구곡이다.

옥녀담 남쪽에 있는 여울인 봉래구곡은 직소폭포에서 흘러온 맑은 물이 반석 위로 흘러 바위 돌에 소용돌이쳐 여러 굽이를 이운 곳이다. 반석의 곳곳에 사람들이 새겨 놓은 글자가 있어 예로부터 이곳이 사람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봉래구곡 옆 바위위에는 돌탑이 있는데, 이곳에서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옥녀봉, 선인봉, 쌍선봉 등의 봉우리들에 휩싸여 흐르고 있는 2km의 봉래구곡 속에서도 단연 빼어난 변산 팔경의 제 1경이 실상 용추를 이루고 실상 용추에서 흐르는 물은 바로 아래 제 2, 제 3의 폭포를 이루며 흘러 분옥담, 선녀탕 등의 소를 이루며 이를 일컬어 봉래구곡이라고 부른다.

가파른 산길을 조금 더 오르자 나타나는 폭포가 직소폭포다. 변산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이 폭포는 높이가 약 20m쯤 되는데, 깎아지른 절벽에서 물이 곧바로 떨어지는데 그 모양이 흰 비단을 똑바로 드리운듯하다.

폭포 밑에 있는 쏘를 실상용추라고 부른다. 물이 맑고 깊어서 파란 빛을 띠고 있는 이 소에 날이 가물면 부안 원님이 정성껏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 특이하게도 산돼지를 그대로 잡아 물속에 넣었다고 한다.

부안 직소폭포 가는 길 (신정일)
부안 직소폭포 가는 길 (신정일)

이곳을 찾아서 <유봉래산일기>를 남긴 사람이 조선후기의 학자인 소승규였다.

시냇물을 거슬러 오르다가 직소에 이르렀다. 한 줄기 폭포가 바위 꼭대기에 걸려서 흩날리며 수백 척을 곧바로 떨어졌다. 은하수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듯 했다.

그 아래에 용소가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물빛이 몹시 푸른데 돌에부딪쳐 물살이 부서졌으며.햇빛에 반사되어 부딪쳤다.

푸르게도 보이고 붉게도 보여, 무지개가 다섯 가지 빛깔을 내는 것 같았다. 신룡이 그 아래 엎드려 있는 것 같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없지만, 오래 머물지 못했다. 예전에 이른바 ‘근원에서 살아 있는 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이라네’라는 구절이 바로 용소가 아니라면 무엇을 가리키겠는가.

옛날부터 여산폭포의 아름다운 경치는 들었지만 용소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이곳은 폭포의 아름다운 경치를 아울러 갖췄으니 이야말로 천하의 장관이라고 말할만하다. 그래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위에 긴 근원이 있어 살아 있느 물이 흐르니

은하수가 구름 끝에 걸린 듯 하네.

천 척을 떨어져 용소가 되니,

밤낮 내뿜는 물결이 잠시도 쉬지 않네

이 직소폭포의 용소를 넘친 물줄기가 다시 바위 사이를 흘러 제 2, 제 3의 폭포를 이루고 옥녀담이 된다.

멀리선 듯 떨어지는 한줄기 폭포, 폭포를 두고 노래한 시인이 김수영이다.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나는 폭포 아래로 내려가 가만히 바위 위에 걸터앉는다.

떨어지는 폭포수 소리는 내 가슴속으로 파고들고 나뭇잎이 한 잎, 두 잎 물 위에 떨어진다. 문득 바람이 우수수 불고 그렇다.

빗자루로 쓸어대는 것처럼 물살들이 어딘가를 향해 우르르 밀려가고 밀려오는 그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길에 나선다.

직소폭포 위에서 내변산은 찬연하다 못해 황홀하다. 멀리 의상봉을 비롯한 변산의 봉우리들이 나를 향해 달려오고, 다시 산길에 접어드는데,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가슴속으로 촉촉이 스며든다.

직소폭포를 지나면서 길은 평탄하다. 마치 그 옛날 이곳쯤에도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고 살았을 법하다.

형형색색 나뭇잎들이 붉게 물들어 있고, 길 아랫자락을 흐르는 물소리는 단아하다.

어쩌다 만나는 등산객들이 서로 만났다 헤어지고 부는 바람결에 우수수 나뭇잎들이 떨어진다.

호남의 5대 명산으로 불리는 변산은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려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변산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보안현에 있다. 지금 현과의 거리는 서쪽으로 25리인 데 능가산으로도 불리고, 영주산으로도 불린다. 즉, 변산(卞山)이라고도 하는데, 말이 돌아다니다가 변으로 되었다고 한다. 변한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라 하나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봉우리들이 백여 리를 빙 둘러 높고 큰 산이 첩첩이 쌓이고 바위와 골짜기 깊숙하며 궁실과 배의 재목은 모두 여기서 얻어갔다 전하는 말에는 호랑이와 표범들이 사람을 보면 곧 피하였으므로 밤길이 막히지 않았다 한다”

이곳 변산은 충청도 안면도의 소나무 숲, 그리고 천관산의 소나무 숲과 더불어 목재의 생산지로서 나라 안의 손꼽히던 곳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변산은 마구잡이 벌목으로 인하여 소나무 숲은 없고 잡목만이 무성할 뿐이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남부군이 결집되어 있던 회문산에서 덕유산과 이 변산으로 남부군이 나뉘었었고 영화 남부군에서 안성기 부대는 덕유산으로 가고 이곳으로 왔던 최진실 부대가 모조리 쓰러져 갔던 비운의 현장이기도 하다.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능가산 가인봉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가인봉에서 내소사로 이어지는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제법 가파르고 길이 험하므로 조심해야만 한다.

가인봉과 능가산의 붕이라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길은 아래로 이어지고 곧 바로 전나무숲이 울창한 내소사에 이르는 길이다.

가고 또 가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아름다운 명승, 직소폭포를 보고 내소사에 이르는 길을 걷다가 보면 한 시름 두 시름 쌓였던 것들이 풀리지 않겠는가?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더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