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을 지나 나주로 가다가 보면 영암의 서쪽에 금강산 같이 우뚝우뚝 서 있는 돌로 된 산이 있다. 그 산이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일컬어지는 월출산이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인 이증환이 지은 '택리지' 에 쓰여진 월출산(月出山)의 기록을 보자.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은 돌 끝이 뾰족뾰족하여 날아 움직일 듯 한 것이 마치 도봉산이나 삼각산과 같으나, 바다에 너무 가깝고 골짜기들이 적다"

월출산은 평지돌출의 산으로 기암괴석이 많아서 남도의 소금강산으로 불리고 있다. 산의 최고봉은 천황봉이며 구정봉(743m).도갑산, 월각산, 장군봉, 국사봉 등이 연봉을 이룬다. 대체로 영암군 쪽에 속하는 산은 날카롭고 가파른 돌산이며 강진군 쪽에 속하는 산은 육산이다. '동국여지승' 에 기록된 바로는 월출산은 신라 때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 때에는 월생산(月生山)이라고 불리었다. 

월출산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시인 묵객들의 칭송을 들었다. 고려 때의 시인 김극기(金克己)는 "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 지어내고 추위와 더위가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며 기이함을 자랑하누나"라며 노래했고, 김시습은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 했다. 

강진 무위사(신정일 기자)
강진 무위사(신정일 기자)

월출산 자락에 있는 아름답고 유서깊은 절이 무위사(無爲寺)다. 이 절은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의 월출산(809m) 동남쪽에 있는 사찰로서 대흥사의 말사이다. 고적하면서도 그 아름다움이 빼어난 무위사는 '사기' 에 의하면 신라 진평왕 39년(617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여 관음사라고 했고 헌강왕 원년(87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갈옥사로 바꾸면서 수많은 스님들이 머물렀던 곳이다. 그 뒤 고려 정종 원년(946년)에 선각국사가 3창하면서 방옥사라고 개명했고 조선 명종 5년에 태감선사가 4창하면서 인위나 조작이 닿지 않은 맨 처음의 진리를 깨달으라는 뜻의 무위사라는 이름을 붙였다. 조선초기 선종사찰에서 태고종 절로 바뀐 무위사는 사찰통폐합의 와중에도 이름난 절에 들어 그 위세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죽어서 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떠도는 망령들을 불력으로 거두는 수륙재(水陸齋)를 지내는 수륙사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절의 건물로는 극락보전, 명부전과 벽화보존각, 천왕문, 응향각, 천불전, 미륵전, 산신각 등이 남아 있어 56동에 이르렀다는 옛 절의 모습을 그나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무위사의 '사적기' 는 여러 가지 모순점을 지니고 있다. 우선 원효만 해도 진평왕 39년에 출생했기 때문에 창건연대가 훨씬 뒤일 수밖에 없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또한 의문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를 지은 이능화(李能和)나 금서룡(今西龍) 같은 학자들은 "도선국사는 실제 인물이 아니고 형미대사의 행적을 바탕으로 몇 사람의 행적을 보태어 꾸며낸 가공의 인물일 것이다"라는 주장을 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이 후삼국시대 선종과 함께 도입된 풍수도참사상이 고려시대를 풍미했고 고려 건국이 풍수도참사상으로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고려 왕권의 당위성을 정당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의 승려였던 광운은 '도선전' 에서 도선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선의 어머니 최씨가 한 자 넘는 외를 따먹고 처녀로 임신하여 도선을 낳았으며 애비를 모르는 자식이라 하여 그 친정 부모가 화를 내고 대밭에 버렸다. 그러자 비둘기와 매들이 날라 와서 날개를 덮고 보호하였으므로 다시 데려가 길러 출가를 시켰다. 그는 당나라로 건너가 일행(一行)선사로부터 풍수도참설을 전수받았다"  도선의 출현 이후 이 땅에는 수많은 풍수가들이 나타나 현대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강진 무위사(신정일 기자)
강진 무위사(신정일 기자)

조선의 선비 같은 무위사의 극락보전

무위사에는 느티나무, 팽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정면에 소박한 아름다움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극락보전이 단아하게 서 있다. 김제 귀신사의 대적광전이나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 부석사의 조사당과 안동 봉정사의 극락보전 같은 조선초기의 맞배지붕 겹처마에 주심포집인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바라보면 볼수록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조선 선비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극락보전은 1934년 일제에 의해 국보 13호로 지정되었다가 1962년 우리 정부에 의해 다시 국보 13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해체‧복원공사 중 중앙 칸 복원공사에서 발견된 명문(名文)에 의하면 정면 3칸에 측면 3칸인 이 건물은 조선초기인 세종 12년(1430년)에 효령대군이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1950년 극락전 수리공사를 하던 중 본존불 뒤쪽의 벽화 아래 서쪽에 쓰여진 기문에 의하면 성종 7년(1476년) 병신년에 후불벽화(後佛壁畵)가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를 대표할 만큼 뛰어난 아미타삼존좌상이 어느 때 조성되었는지 확인할 길이 없으나 극락보전 안벽에 그려져 있는 많은 벽화들을 1974년 해체‧보수하다가 그 벽화들을 통째로 드러내어 벽화 보존각을 지어 따로 보관하고 있다. 

고려불화의 맥을 잇는 전통적인 후불벽화는 신필에 가깝다. 그 벽화에 얽힌 일화는 이렇다. 법당이 완성된 뒤 이 절을 찾아온 한 노(老)거사가 벽화를 그릴 것이니 49일 동안 법당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했다. 49일 되던 날 무위사 주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법당 안을 들여다보자 파랑새 한 마리가 입에 붓을 물고 마지막으로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눈동자를 그리고 있었다. 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지금도 후불탱화의 관음보살 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극락전 옆에는 선각(先覺)대사 형미(逈微)의 부도비와 삼층석탑이 서 있고 미륵전에는 마음씨 좋은 동네 아줌마 형상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으며 그 옆에는 산신각이 있다.

월출산 설록차 밭(신정일 기자)
월출산 설록차 밭(신정일 기자)

월출산 아랫자락 길을 넘어가다 보면 사시사철 푸르게 펼쳐진 ‘태평양 설록차’ 밭을 만날 수 있고 고개를 올려다보면 불꽃처럼 뾰족뾰족한 바위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산 정양용은 강진 땅으로 유배를 가다 월출산 자락을 보며 시 한 편을 남겼다.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 있네.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 말게.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월남사지 3층석탑(신정일 기자)
월남사지 3층석탑(신정일 기자)

그 경포대를 바라보는 곳에 월남사지가 있다. 월남사지3층석탑은 정읍 영원의 은선리 3층석탑이나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을 연상시키는데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중기 송광사에 주석하면서 수선결사운동(修禪結社運動)을 펴다가 입적한 보조국사의 대를 이어 수선결사를 이끌었던 진각국사 혜심이 창건했고, 이 비는 이규보가 썼다고 전해지지만 창건 이후 중창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가람고' 등에 이 절이 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이 석탑을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벽돌 모양으로 만든 모전석탑이라고 부르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고 백제탑을 모방한 고려탑이라고 볼 수 있다. 월남사지3층석탑에서 100미터쯤 가면 동백나무숲 속에 보물 313호로 지정된 부도비가 있다. 진각국사 혜심의 비인데 비문에 그의 제자였던 최이, 최창 등 고려 무신정권의 핵심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역사는 무상한 것이라서 깨진 비석을 등에 진 채 용머리 형상의 거북만 남아 그 옛날을 증언할 뿐이다.

아름다운 절 무위사와 월남사지를 산자락에 둔 월출산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오르 내리며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고 있으니...

신정일 기자 thereport@therepor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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