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발전 이면엔 학자들의 눈물겨운 투혼이 있었다. (사진=픽사베이)

[더리포트] 우리가 지금, 이 지구에서 얻는 편리는 앞선 학자들이 공들여 쌓은 결과물이다. 여기에는 죽음을 불사하고 몸 던진 실험정신과 어떻게든 학문의 탑 위에 벽돌 하나를 더 얹으려던 장인정신이 있었다.

캐나다의 내과의사 프레더릭 밴팅(Frederick Grant Banting, 1891~1941)은 인슐린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당뇨에 대한 생각은 잊고 안정된 병원 일에 전념하라’는 약혼녀의 요청을 뿌리치고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약물을 자신의 팔에 찔러 넣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찬사를 얻었다.

‘의학 역사상 단일 사건 가운데 이렇게 갑자기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 사건은 없었다.’

섭씨온도계는 1742년 스웨덴의 물리학자인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1744)가 만들었다. 이 온도계의 발명으로 ‘대체 인체는 얼마나 높은 온도까지 견딜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이에 대한 답은 1774년 영국의 의사 조지 포다이스(George Fordyce, 1736~1802)가 줬다. 그는 친구들을 초청해 ‘인간 한계 온도‘에 대한 실험을 했다. 실험실에 직접 들어가 체험해보기로 한 것이다.

'수은주는 60도, 70도, 80도....급기야 92도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상아로 만든 온도계는 뜨거운 열기로 깨져버렸다. 실험은 계속 되었다. 이후 방의 온도는 100도를 돌파했고 최고 127도까지 상승했다. 그러자 날달걀이 20분 만에 익었고, 33분 후에 스테이크가 바싹 익었다.' - <세상을 살린 10명의 용기있는 과학자>중에서

127도. 사우나 불가마가 대중화된 요즘은 대단한 숫자가 아니다. 하지만 당시로선 무시무시한 온도였을 것이다.

왼쪽부터 물리학자 셀시우스, 피카르, 수학자 갈루아. (출처=위키피아)

과학실험을 위해 온 몸을 던진 사람으로 스위스 물리학자 오귀스트 피카르(August Piccard, 1884~1962)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스스로 만든 기구를 타고 2만 3천미터 상공까지 올라간데 이어, 바다 밑 1만m의 잠수에 성공했다. 바다 속에 10미터만 내려가도 수압 때문에 온 몸이 쥐어 짜이는 느낌이 든다.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피카르 박사의 실험이 얼마나 무모한지 짐작할 수 있다.

위험한 실험에 자신뿐만 아니라 자녀를 동원한 이들도 있다. 과학자 존 스콧 홀데인(John Scott Haldane, 1860-1936)이 그 한 명이다.

호흡 생리학자인 그는 메탄을 들이 마실 때의 인체 변화를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했다. 존 홀데인은 아들 잭에게 메탄가스를 마시게 했다. 잭은 이내 숨을 헐떡거리고, 다리를 후들후들 떨다가 바닥에 쓰러졌다. 실은 잭은 3살 때부터 아버지 실험을 위해 피를 뽑아야 했다. 이 뿐 아니다.

일본의 의학자 후지타 고이치로는 알레르기 치료 물질을 찾기 위해 몸속에 기생충(촌충)을 키웠고, 이탈리아 라치로 스팔란차니(Lazzaro Spallanzani, 1729년~1799년)는 잘 알려지지 않은 소화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나무 튜브를 삼켰다.

미국의 치과의사 호러스 웰스(Horace Wells, 1815~1848)는 웃음가스라 불린 이산화질소가 마취제로 쓰일 수 있는지 알아내려고 자신의 사랑니를 뽑았다. 심지어 뱀독으로 만든 면역혈청이 효과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살모사 세 마리에게 몸을 물리게 한 의사(스위스 자크 퐁토)도 있다.

고독한 데다 운까지 없었던 학자도 있다.

수학자 갈루아(Evariste Galois, 1811~1832)가 그 주인공이다. 수천 년 동안 방정식의 역사는 진보했으나 5차방정식의 벽에 부딪혀 300년을 제자리걸음을 했다. 답은 ‘해를 구할 수 없음’이었다. 갈루아는 그 사실을 증명했다.

1832년 5월 30일. 갈루아는 1대1 권총 결투를 벌였다. 총알은 그의 복부에 박혔고 다음날 숨졌다. 그런데 그는 전날 밤, 미친 듯이 자신이 발견한 수학 이론을 정리해 편지로 남겼다. 훗날 수학에서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이론인데 이 60쪽 분량의 ‘유산’은 수학에 혁명을 일으켰다. 

그의 중요한 논문은 퇴짜 맞거나 분실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는 남긴 편지에서, 언급한 주제들이 자신이 연구한 내용의 전부가 아니라며 이런 글을 남겼다.

‘내게는 시간이 없다.‘

갈루아가 숨진 나이는 불과 21살. 인류에게는 애석한 일이다. 갈루아에 대한 전기를 쓴 천문학자이자 과학저술가 마리오 리비오(Mario Livio)는 “그의 천재성은 초신성에나 비교할 수 있다”고 말했다. 초신성은 그야말로 별 따기 만큼 발견하기 어려운 별이다. 그나마 갈루아가 전날 편지를 남김으로써 수학사와 과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땅에 묻히는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저작권자 © 더리포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