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리포트] 1504년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1483~1520)는 예술의 중심지 피렌체로 떠났다. 그곳에는 명성이 하늘을 찌를 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가 경쟁하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22살. 레오나르도보다 서른한 살이 적고, 미켈란젤로보다 여덟 살이 적었다.

화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 그 앞에는 엄청나게 큰 거목이 양쪽에 서 있다. 이 때 어린 라파엘로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런데 라파엘로는 범상치 않았다. <서양미술사>를 쓴 E.H.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다른 젊은 미술가라면 이 거장들의 명성에 압도되어 기가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배우기로 결심했다.

라파엘로는 어릴 적 양친을 잃은 불우한 화가였다. 두 거장 사이에서 그가 구사한 전략은 사교성과 노력 외에 소위 ‘스폰지 전략’이었다. 그는 약 4년간 피렌체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거장들의 장점과 새 미술 기법을 흡수했다.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통해 우아하고 은은한 채색 기법을, 프라 바르톨로메오의 장중하고 웅대한 종교화 제작 기법을, 미켈란젤로의 긴장감과 활력 넘치는 인물 데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로부터 엄숙함을, 레오나르도로부터 색채의 마법(명암 배합)을 배웠다. 그는 요즘시대로 말하면 ‘융합형’ 인재였다.

그의 화풍은 자연스러움과 조화, 그리고 완벽함이란 단어로 장식된다. 미술가들이 그에게 보내는 찬사 역시 ‘완벽한 아름다움의 추구’이다. 여기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라파엘로가 <요정 갈라테아>를 그렸을 때 일이다. 한 귀족이 그 아름다운 모델을 어디에서 구했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실존인물이 아니었다. 라파엘로의 마음속에 존재했던 ’미의 이상‘이었다.

요정 갈라테아(The Triumph of Galatea, 1511년).
요정 갈라테아(The Triumph of Galatea, 1511년). (사진=픽사베이)

라파엘로는 미술사에서 찬란한 인물로 남았다. 비록 모차르트와 같은 나이인 37살에 숨졌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놀라웠다. 모든 로마시민이 그의 죽음을 눈물로 애도했다고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에 대해 쓴 한 묘비명이다. 당시 한 추기경은 다음처럼 글을 지어 바쳤다.

여기는 / 생전에 어머니 자연이 / 그에게 정복될까 / 두려워 떨게 만든 / 라파엘로의 무덤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 그와 함께 자연 또한 / 죽을까 두려워하노라

어머니 자연이 정복될까 두려워 떨게 한 화가라니.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자연의 아름다움은 인공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자연은 미의 원본이다. 그런데 어떤 화가가 자연보다 더 ‘자연스런’ 그림을 그렸다. 자연을 굴복시킨 것이다. 그러니 그 화가가 다가가면 자연은 언제든, 또다시 붙잡힐까봐 떨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그렇게 잘 그린 화가가 사라졌으니, 한때 그 포로였던 자연의 입장은 어떨까. 살아있음이 무색해진다. 어떤 화가에게 ‘자연을 벌벌 떨게 한 인물’이라는 수식어만큼, 더한 찬사가 있을까 싶다.

왜 라파엘로가 특별한가. 이에 대해 곰브리치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림 <요정 갈라테아>에 대한 글이다.

'라파엘로는 그림이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지 않게 하면서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물들을 배치하는 탁월한 솜씨, 구도를 만드는 최고 극치에 달한 숙련된 솜씨로 인해 후대의 미술가들이 그를 그처럼 찬양했던 것이다.'

고매한 미의식과 아름다움을 향한 열정. 라파엘로는 화폭 속에 절대 미를 담으려 한 점에 비추어보면 최고의 탐미주의자다. 인생을 아름다움을 좇는 여행으로 규정하면 어떨까.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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