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리포트] 화장품 CF 모델의 피부, 고급 주택의 대리석의 표면, 최고급 참치 뱃살. 이 셋의 공통점은 부드러움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매끄러움’이다. 그런데 이 매끄러움을 매우 부정적인 시선으로 비판하는 주장이 있다.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저서 <아름다움의 구원>(문학과지성사, 2016)을 통해 매끄러움이 ‘우리사회를 지배하는 미의 속성’이라며 실체를 설명했다. 왜 매끄러움이 문제인가.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매끄러운 조형물들 앞에 서면 그것을 만지고 싶다는 “촉각 강박”이 생겨나고, 심지어 그것을 핥고 싶은 욕망까지 일어난다. (12쪽)

매끄러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욕망을 일으키는 달콤한 유혹이다. 그러나 이는 예술의 본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이유 때문에 매끄러움이 ‘죄인’은 아니다.

문제는 다음이다. 매끄러움이 표피, 외형을 떠받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매끄러움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이면을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외형과 함께 본질을 살펴야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매끄러움의 이데올로기다.

“매끄러움은 미적 효과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의 사회 전반적인 명령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긍정사회를 체현하는 것이다. 매끄러운 것은 상처를 입히지 않는다. 어떤 저항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좋아요Like를 추구한다. 매끄러운 대상은 자신의 반대자를 제거한다.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다.”(9~10쪽)

이 문장은 일상을 돌이켜 보면 이해된다. 피부에 난 잡티는 있어서는 안 될 트러불로 치부된다. 그렇게 되면 하얀 피부는 신성시 된다. 즉 ‘반대자를 애초부터 제거함으로써 매끄러움은 오로지 매끄러움만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든다.’

이는 다원적 사회와 거리가 있는 순결주의, 전체주의와 같은 위험한 사고를 초래한다. 매끄러움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만 ‘저항과 부정성’은 없다. 이는 자연이 미와 추의 공존으로 생명을 이어간다는 점을 상기시키면 이해할 수 있다.

그 한 예가 제프 쿤스의 작품이다.

Balloon Swan
'Balloon Swan'(사진=www.jeffkoons.com)

제프 쿤스는 ‘예술이란 오로지 아름다움, 기쁨, 소통일 뿐’이며 ‘예술의 핵심은 매끄러운 표면과 이 표면이 직접적인 작용에 있고, 그 외에 해석할 것도, 해독할 것도, 생각할 것도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한병철은 그 대척점에 있는 부정성, 추, 역겨움을 강조한다. 부정성이 예술의 본질이다. 여기에는 스스로를 뒤흔들고, 파헤치고, 의문을 제기하고,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경고가  있다.

그런데 매끄러움의 미학은 부정성이 제거된 형태다. 어떤 균열도, 어떤 낯섦도, 어떤 비동일성도 허용하지 않는 미학이다. 하지만 진정한 미학은 다르다.

그의 예술에는 거리를 두게 하는 부정성이 빠져 있다. 오로지 매끄러움의 긍정성만이 촉각 강제를 불러일으킨다. 이 긍정성은 관찰자를 거리 없애기로, 터치로 이끈다. 그러나 미적 판단은 관조적인 거리를 필요로 한다. (12쪽)

매끄러움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어디선가 날아와 우리의 뇌에 내려앉은 미에 대한 왜곡된 관념을 환기시킨다. 매끄러움의 숭배 속에서 미를 구성하는 반대의 요소들은 어느 덧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자각이 드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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