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리포트] 우리 사회에는 이 세계가 나아갈 항로를 맨 앞에서 이끄는 지(知)의 최전선이 있다. 때때로 그 전선은 지식의 높이와 지리적 장애로 난공불락이어서 보통사람이 접근하지 못한다. [더 리포트]가 그 현장을 찾아 삶의 지혜, 한 수를 전한다. -편집자 주

잡지박물관에 전시된 잡지들.

'잡지.'

아마 지식인에게조차 외면받는 이름이다. 근래에 잡지(종이)를 읽은 기억이 있냐고 묻는다면 아마 열에 아홉은 없다고 말할 터이다. 

그 잡지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때가 있었다. 90년대까지 만해도 공공기관 민원실이나 미장원 같은,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는 잡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이용객은 기다리는 시간을 잡지 읽기에 쏟았다. 그 시절엔 신문이나 방송이 정보의 교과서라면 잡지는 참고서였다. 나름대로 지식의 최전선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보가 넘치는 인터넷 시대에 종이로 된 교과서나 참고서는 학교에서나 존재한다. 나머지는 온라인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계속 쇠락해가는 분야가 출판이다. 책, 신문, 잡지의 퇴화작용은 가파르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사장 민병욱)의 ‘2018 잡지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잡지 수는 4년 전에 비해 19.4% 감소했다. 매출액은 24.7%가, 종사자 수는 33.6% 감소했다.

이를 증명하듯 지금은 일상에서 잡지를 보는 풍경이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앞의 통계가 역설적으로 보여주듯, 아직도 잡지는 신문이 그러하듯 여전히 발행 중이다. 한때 지식과 정보의 메신저로 한 몫 단단히 했던 잡지의 현주소가 궁금해 지난 20일 잡지박물관을 찾았다.

잡지박물관의 ‘전시관’은 10개의 시대별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 잡지 실물이 신기해

잡지박물관은 우리나라에서 펴내는 모든 잡지를 모아놓은 곳이다. 잡지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장소가 특이하다. 음식점과 술집으로 둘러싸인 여의도 번화가 건물 지하에 있다. 

입구에 간판이 걸렸건만, 그 주변에 잡지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기자가 인근 자영업 종사자와 직장인에게 물음을 떠봤으나 대부분 잘 몰랐다. 설사 알고 있다 해도 방문해본 사람 역시 극히 적다.

한국잡지 1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잡지박물관은 도서관 같은 이미지가 아닌, 미술관이나 전시관 같은 분위기였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장소는 3개 파트로 구분되었다. 잡지를 비치한 잡지 전시실과 명예의 전당 그리고 과거 잡지를 보여주는 ‘전시관’이다.

‘전시관’은 10개의 시대별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다. 태동기, 무단 정치 시기, 문화 정치 표방 시기, 친일 언론 강요 시기, 해방 초기, 새로운 출발 시기, 다양화 전문화 시기, 언론의 위축시기, 6.29 이후와 온오프라인 잡지의 공생 시기 등이다. 각 카테고리별로 잡지가 전시되어 있고, 잡지의 경향과 그 시대에 대한 설명을 해놓았다.

간행 500호 돌파 잡지들 표지.

잡지는 신문처럼 시대를 담는다. 따라서 잡지의 내용은 현대 역사의 굴곡과 궤를 같이한다. 이를테면 ‘태동기’에는 주로 각종 협회와 종교단체에서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소개하는 잡지가 간행됐다. 이 때는 잡지가 민족의 대변자로, 국권회복의 선구자로, 계몽과 개화의 역할을 담당한 시기다.

제3기 문화정치표방시기는 1919년 3ㆍ1독립운동 이후를 말한다. 일본의 한국 언론에 대한 정책이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되면서, 한국인들에게도 신문지법에 의한 신문, 잡지의 발행을 부분적으로 허용했다. 이 때 <폐허>(1920), <개벽>(1920), <백조>(1922) 같은 잡지가 나왔다.

이어 1937년부터 1945년 8ㆍ15광복을 맞을 때까지 암흑시기를 거쳐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1960년까지 약 10년간 잡지의 르네상스를 꽃피웠다. 대표적인 잡지는 <사상계>로 종합지로서 해방 후 최장수를 기록 했고, 언론으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61년부터 80년대까지 독재정권 치하에서 오락 잡지가 급격히 늘었다. 이후 등장한 신군부에 의해 많은 잡지가 등록이 취소되는 아픔을 겪었다. 1990년 들어서 잡지는 더욱 다양해지면서 전문화되었고, 잡지로 분류되는 정기간행물이 6,433종(2000년)에 이르렀다.

이 전시관의 가장 인상적인 점은 옛날 교과서에 나오는, 혹은 이름만 들었던 잡지의 실물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 <소년>이나 해방 이전 대표적 잡지인 <개벽>, >삼천리>, <어린이> 등이다.

잡지박물관 '문학' 코너의 문예잡지들.

문학 잡지만 100종 득세...책, 신문과 다른 매력

요즘 잡지를 열람할 수 있는 ‘잡지 전시실’은 흡사 도서관 같았다. 이 곳엔  최근의 주요 잡지들이 주제 별로 비치되어 있다. 시사, 스포츠, 패션, 레저 같은 식이다.

이 곳에 오면 두 가지 생각이 따라붙는다. 하나는 ‘잡지가 여전히 많구나’이다. 문학지 코너에는 말 그대로 문예잡지가 나열되어 있었는데, 세어보니 무려 100백종 가까이 되었다. 여전히 문학 쪽에서는 잡지의 위력이 현재진행형 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하나 드는 생각은 ‘이런 잡지가 다 있구나!‘이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잡지가 우리 몰래 간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뉴필로소퍼(New Philosopher)’가 그렇다. 철학을 쉽게 풀어낸 ‘철학잡지’다. ‘호주판’을 번역한 원고에 국내 원고를 더해서 펴낸다.

분기 별로 펴내는 이 잡지의 이번(1월) 호의 주제는 ‘권력’이다. 잡지의 문을 여는 ‘편집자의 편지’에는 ‘권력을 양지로 끌어내자’는 글이 인상적이다.

잡지 '신세계', '소년', 뉴필로소퍼'

“...권력의 영향력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은둔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뿐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지적했듯이 고독은 오직 신과 동물만을 위한 미덕이다. 따라서 우리는 옳든 옳지 않든, 이롭든 이롭지 않든,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권력과 얽힌 인생을 살아내야만 한다.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외면한다면, 권력은 어둠 속에 도사린 채 우리의 삶에 언제든 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권력을 양지로 끌어내고 조명을 비춤으로써 그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권력에 관한 양질의 글이 계속 이어졌다. 글을 읽다보니 잡지박물관에서 횡재를 한 기분이다.

잡지박물관에는 이들 전시실 외에 숨어있는 수장고와 납본실이 있다. 수장고는 귀중한 잡지 보관을, 납본실은 잡지의 입출입 기능을 담당한다. 잡지는 매달 출판사 혹은 발행처로부터 기증받는다. 그 잡지를 전시한 후 한 달 정도 후에 대부분 폐기처분한다.

그 외 에 고(古)잡지 디지털관이 있는데, 역사적, 문헌적, 정보적 가치가 높은 중요한 옛날 잡지를 디지털화해서 저장한 사이버 정보공간이다.

흥미롭게도 요즘엔 최신 잡지도 디지털 공간 안에 있다. 이 잡지들은 인터넷에 총 집합된 지식, 정보와 싸우는 중이다. 과연 승산이 있을까.

잡지박물관 단골 방문자 최호성(53)씨의 말이 기울어가는 저울의 눈금을 지탱해주는 듯했다.

“여전히 매달 새로 나오는 잡지가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수요가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잡지는 색다른 매체입니다. 늘 읽던 포털 사이트의 뉴스나 검색 정보와는 다른, 또한 일반 책과도 다른 읽읽기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잡지의 매력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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