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표지.

[더 리포트] 오늘,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이다.

최근 언론을 통해 자치단체장들이 '3‧1독립선언서' 필사 나섰다는 기사를 접했다. 좋은 문장 필사를 늘 해온 터라 관심을 갖고 읽었다. 처음엔 그 어려운 한문을 언제 다 베끼나 싶었다.

알고보니 필사의 대상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내놓은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이하 '쉬운 독립선언서')였다. 즉 한글 버전였다. 검색을 해보니 이 버전이 네티즌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블로그나 카페에 관련 글을 퍼서 올린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런데 읽다보니 뭐랄까,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그 3‧1독립선언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라는 한문이 자연스럽게 머리에 떠올랐다. 대한민국 중, 장년층 국민이면 대부분 외우고 있는 문장이다. 그런데 다음 대목을 읽다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원본은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이다.

좀 어색하지 않은가. 살펴서 원본과 대조를 해본 결과, 번역이 잘 못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직역을 하면 이렇다.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히 하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이 글은 ‘이로써~’가 대구(對句)를 이룬 문장이다. 대구란 비슷한 어조의 글을 서로 짝을 짓게 해 운율과 감흥을 주는 수사법이다. 그렇다면 이 대구는 살려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 볼 점은 ‘告(고)’와 ‘誥(고)’의 미세한 차이다. 둘 다 ‘알린다’는 뜻이지만 뒤의 ‘誥‘는 ’가르치다‘, 즉 ’깨우치게 하다‘로 읽힌다. 서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에게는 알리고, 자손들에게는 가르쳐준다는 뜻이다. 이는 글쓴이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따라서 번역하면 이 정도가 맞다.

[우리는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는 (이로써) 후손에 깨우쳐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쉽고 바르게 읽는 3.1 독립선언서'는 '이로써' 대신 '이를'이란 단어를 썼다. 생략된 대구 표현을 살리고 보면 번역은 말이 안된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는 이를) 우리 후손이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뒤쪽 문장의 주어와 술어 관계가 맞지 않는 것이다. 아래처럼 ‘우리 후손에 알려’란 말이 없어서 그렇다.  

[우리는 이를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모두 평등하다는 큰 뜻을 분명히 하고, 우리는 이를 우리 후손에 알려 민족 스스로 살아갈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리게 할 것이다.]

이어지는 글이다.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箝制의 痛苦를 嘗한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와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우리 민족이 수 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리는 고통을 받은 지 십년이 지났다.] 

여기는 잘 된 번역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다음에 있다.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ㅣ며 心靈上 發展의 障礙됨이 무릇 幾何ㅣ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ㅣ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ㅣ뇨.

이 글은 역시 ‘무릇 기하’가 세 번 겹치는 대구 표현(굵은 글씨)이다. 그런데 아래 '쉬운 독립선언서'의 번역을 보라. 갑자기 대구가 사라졌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물론 지금처럼 해도 뜻은 통한다. 그러나 이 글은 우리 민족의 고통을 감탄조로 내뱉으면서 읽는 이의 감정을 최고조로 이끄는 대목이다. 따라서 ‘기하(幾何)이뇨’, 즉 ‘얼마인가’란 표현은 반드시 살려야 한다. 다음처럼 했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얼마이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이 얼마인가.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사실 이 문장은 끊지 않고 이어가는 쪽이 옳다. 대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라는 부사를 넣으면 리듬감이 있어진다.

[그동안 우리 스스로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고통은 얼마이며, 정신을 발달시킬 기회가 가로막힌 아픔은 얼마이며, 민족의 존엄함에 상처받은 아픔 또한 얼마이며, 새로운 기술과 독창성으로 세계 문화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얼마인가.

원본, 3.1독립선언서는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썼다. 학교 교과서에 실린 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쓴 장본인이다.

3‧1독립선언서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히는 문인이 쓴 명문이다. 함부로 번역하면 안 된다. ‘쉽고 바르게 읽는 3‧1독립선언서’. 쉽게 번역했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르게’라는 단어에는 동의할 수 없다. 대체 누가 번역을 했는지 한문 독해력과 한글 문장력이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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